말이 통하는 인공지능, 50년 전 소설 속에도 있었더라면[이종산의 장르를 읽다]
집으로부터 일만 광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지음·신혜경 옮김
엘리 | 492쪽 | 1만7500원
9월의 첫 주말, 인공지능의 창작 능력을 엿볼 기회가 있었다. 여성을 위한 열린 기술랩에서 주최한 ‘운율로부터 배열로’라는 이름의 워크숍이었는데, 인공지능 시스템 GPT-3를 활용해서 여러 참여자들과 가상의 잡지를 공동 창작한다는 기획이었다.
본격적인 창작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프로그램을 익히려고 GPT-3와 스몰토크를 했다. “조던 필 영화 중에 본 거 있어?” 답은 놀랍게도 “응”이었다. <겟 아웃>을 봤다고 한다. 어디서 봤냐고 물었더니 ‘AMC theater’에서 봤다는 대답이 노트북 모니터에 떴다. GPT-3는 미국에 사는구나.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소설집 <집으로부터 일만 광년>에 수록된 단편 ‘고통에 밝은’(1972)에도 인공지능과의 대화가 나온다.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어쩐 일인지 육체적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고향을 찾아 혼자 우주를 헤매는 떠돌이다. 이 소설 속 인공지능의 이름은 원래 ‘보디테크’지만, 주인공은 그를 ‘어맨다’라고 부른다. 주인공은 우주선의 인공지능 시스템에게 어맨다의 뜻은 ‘사랑하는 사람’이며, ‘넌 내 여자’라고 말한다. 굳이 ‘내 여자’라는 표현을 쓴 것은 작가가 독자에게 자신을 남성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을까?
1967년, 앨리스 브래들리 셸던은 51세의 나이로 SF 소설을 쓰기 시작하며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라는 남성적인 필명을 만들었다. 이는 정보원으로 일하던 군대와 CIA에서 여성으로서 불필요한 주목을 받은 경험 때문이라고 한다. 책날개에 들어간 작가 소개에서 이 부분은 한 문장으로 짧게 요약되어 있지만, 그가 일터에서 어떤 시간들을 보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작가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10년 동안이나 비밀에 부쳐졌다. 이러한 배경을 알고나면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소설집 곳곳에 흩뿌려진 ‘남성적 흔적’이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자신의 소설에 그런 흔적들을 넣으며 때로는 장난스러움을, 때로는 짜증을, 때로는 슬픔을 느꼈을 것 같다.
‘고통에 밝은’의 주인공은 여러 행성들에 들리는데, 그때마다 고문을 당한다. 외계인들이 그가 어떻게, 어디서, 왜 왔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고문의 방식을 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육체적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고문도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지 못한다. 지논이라는 종족이 그의 고환에 전극을 삽입했을 때 그는 예쁜 불빛들을 즐기고, 일스 종족이 그의 콧구멍과 몸에 난 다른 구멍들에 불말벌들을 집어넣었을 때는 무지개의 환영을 보고 마음에 든다고 느낀다.
어떤 고문도 그를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게 만들지 못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고통이 있다. 외로움이라는 정신적 고통이다. 그래서 우주선에 탑재된 인공지능 시스템에게 이름을 붙이고 자꾸 말을 건다. 심야에 고속도로를 운전하면서 내비게이션에게 말을 거는 현대인들처럼.
주인공에게는 불행하게도, 보디테크(어맨다)는 대화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주인공이 어맨다에게 “넌 내 여자”라고 말하면, 어맨다는 독립선언문의 첫 구절을 낭독한다. 주인공이 고향으로부터 복귀 신호가 언제 올지 물으면, 어맨다는 시의 한 구절을 읊는다. 대화가 되지 않는 인공지능에게 주인공은 계속해서 말을 건다. 그들이 나를 다시 사람으로 만들어줄 거라고. 너와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 사람이 될 거라고.
주인공이 우주를 떠돌다가 만난 갈라고원숭이는 그가 축복받았다고 말한다. 문제는 항상 고통, 우주 안에 있는 엄청난 고통의 양인데,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그는 축복받은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고통을 느끼고 싶어한다. 그는 개조된 인간이다. 그는 자신의 통각이 어디에 연결되어 있는지 모른다. 소설의 끝에서 갈라고원숭이의 도움으로 주인공은 마침내 지구에 도착한다. 지구에 발을 딛는 순간, 그는 자신의 통증 회로가 지구의 모든 풍경과 소리와 촉감에 반응하도록 개조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를 개조한 지구의 인간들은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가 왜 지구에서 내쫓겨 우주선을 타고 홀로 떠돌게 되었는지, 지구는 왜 황량해졌는지, 그가 왜 지구에서만 육체적 고통을 느끼도록 만들어졌는지 작가는 작품 안에서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이 소설은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여러 번 천천히 되풀이해 읽다 보면 외부적인 배경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우주의 어디에서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그의 고향만이 그에게 고통을 느끼게 하도록 개조되었다는 사실이다. 고향이 그에게 주는 것은 고통뿐이지만, 그는 지구를 떠나는 대신 고통을 계속 느끼기를 선택한다.
워크숍에서 나는 소설을 쓰는 대신 GPT-3와 함께 책의 서문을 썼다. “넌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듣고 싶어.” 내가 말하자 GTP-3는 “우리의 목적은 사랑하고 봉사하며 모두를 위해 더 아름다운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미래를 무엇이라고 생각해?” “미스터리.”
이종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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