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십자각] 추경호의 오판(誤判)

세종=서일범 기자 2022. 9. 1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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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몇 번 다니다 보면 돈 1000만 원이 '깔딱고개'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온갖 세금에 '복비'와 도배, 이사 비용 등을 모두 더해 셈해 보면 주머니 속 잔돈까지 긁어모아도 도저히 자금을 변통할 방안이 보이지 않아 막막할 때가 적지 않아서다.

1400원을 위협하는 원·달러 환율, 고공 행진하는 물가 속에서 경제 수장으로서 고뇌했을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판단도 일면 존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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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제]

이사를 몇 번 다니다 보면 돈 1000만 원이 ‘깔딱고개’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온갖 세금에 ‘복비’와 도배, 이사 비용 등을 모두 더해 셈해 보면 주머니 속 잔돈까지 긁어모아도 도저히 자금을 변통할 방안이 보이지 않아 막막할 때가 적지 않아서다. 이 때문에 상당수 전문가는 “은행 대출 자체가 곧 최고의 주거 복지”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실제 최고 복지국가로 통하는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은 85%에 이른다. 이들 국가는 다주택자에 한해서만 LTV 비율을 60%로 낮추는 식으로 일종의 페널티를 둔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15억 원 초과 주택에 대해서는 단 한 푼도 대출받을 수 없도록 금지하는 형벌 규정이 벌써 3년째 유지되고 있다. 규제 완화를 검토하던 윤석열 정부도 “또 부자를 위한 정책이냐”고 하는 야당의 정치 공세에 화들짝 놀라 일단 판을 접었다. 1400원을 위협하는 원·달러 환율, 고공 행진하는 물가 속에서 경제 수장으로서 고뇌했을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판단도 일면 존중한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의 선택을 두고 오판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다른 무엇보다 원칙의 문제다. 담보를 잡아 돈을 빌려주고 여기서 적정한 이자를 받는 것이 금융 산업의 본질이다. 담보가 부실하면 신용평가기관 같은 곳이 나서 “대출을 줄이거나 충당금을 더 쌓으라”고 권고할 수는 있겠지만 정부가 개입해 “아파트 같은 자산은 담보가 튼튼하든 말든 돈을 빌려주지 말라”고 금지하는 해괴한 규제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근본적으로 이 과정에서 국민의 거주·이전의 자유가 침해된다는 게 더 큰 문제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좌천 검사 시절 말했던 “일개 장관이 헌법상 국민의 알 권리를 ‘포샵질’을 하고 앉아 있느냐”는 일갈이 이 문제에도 해당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서른다섯 번이나 외친 자유에 대한 존중은 어디로 갔나. 블랙박스 속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기재부 특유의 폐쇄성도 되짚어 봐야 한다. 더 이상 날고 긴다고 하는 수재들이 앞다퉈 문을 두드리던 개발 독재 시절의 기재부가 아니다. 기재부의 ‘엘리트주의’를 철석같이 믿은 결과가 2년 연속 60조 원에 이르는 세수(稅收) 추계 오류 아니었나. 문과 최고 아웃풋이라는 서울대 경영학과 학생들 중 1등은 로스쿨에 가고 2등은 민간 기업에 가고 꼴찌가 행정고시를 친다는 세간의 말을 결코 우스갯소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MZ 관료들의 역량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책일수록 더 논의 절차를 개방해야 한다는 의미다.

경제 관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추 부총리의 장점으로 대개 합리성·포용성 등을 꼽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 숙고해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첫 경제부총리였던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기재부 장관으로 재임할 당시 “혼나는 게 무서워 대면 보고를 꺼렸다”는 증언이 나오는 것과 비교하면 대단히 긍정적인 부분이다.

하지만 합리적 품성이 과단성 부족에 자칫 좌고우면(左顧右眄)으로 흐르게 된다. 추 부총리가 눈앞의 어려움 때문에 결과적으로 신뢰를 잃어 대업을 그르치는 ‘타키투스 함정’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세종=서일범 기자 squiz@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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