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 빌미로 접근하는데 접근금지 기간은 짧아..근절되지 않는 스토킹범죄, 왜?
지난 14일 밤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에서 발생한 스토킹 살인 사건 배경에는 스토킹을 경미한 범죄로 취급하는 법 제도가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스토킹처벌법이 지난해 10월 시행됐지만 스토킹 범죄의 처벌 여부에 피해자 의사를 반영하고 스토킹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는 협소하게 규정했다는 것이다. 스토킹 범죄에 경각심을 갖고 수사·재판해야 할 경찰과 검찰, 법원의 안일한 인식도 문제로 꼽힌다.
■합의 빌미로 피해자 접촉하는 가해자
스토킹 범죄의 반의사불벌 문제는 스토킹처벌법 제정 때부터 한계로 지적됐다. 반의사불벌은 피해자 의사에 반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가해자가 합의를 빌미로 피해자에게 접근해 가해를 지속하고, 피해자의 진정한 의사를 깊이있게 파악하지 않은 상황에서 형식적으로 가해자 면책을 결정한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에서 이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가해자 전모씨(31)는 스토킹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되자 피해자에게 지속적으로 합의를 종용하며 스토킹을 이어갔다. 전씨는 2019년 11월부터 스토킹을 시작해 지난해 10월까지 350여차례에 걸쳐 문자와 카카오톡으로 ‘만나달라’는 연락을 했다. 메시지에는 ‘내가 왜 그랬는지 나도 알 수 없다’, ‘증거가 있다면 줄 수 있나’, ‘할 말이 없느냐’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스토킹처벌법 위반으로 기소된 사건 3건 중 1건꼴로 공소기각 판결을 받는 것도 반의사불벌죄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스토킹처벌법 위반으로 기소돼 1심 선고가 내려진 판결문을 전수 분석한 한민경 경찰대 교수는 16일 “1심 판결문 161건 중 공소 기각이 선고된 게 36%로 58건에 이른다”고 했다. 모든 범죄의 평균 공소기각률(1%)과 비교하면 현저히 높은 비율이다. 수사기관이 유죄로 판단해 재판으로 넘긴 사건들 중 상당수가 무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협소한 스토킹 정의, 보호조치 기간은 짧아
스토킹처벌법이 규정하는 스토킹 행위·범죄의 정의가 지나치게 좁은 것도 문제다. 법에서 말하는 스토킹 행위에 해당하려면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 정당한 이유 없이 상대방에게 불안감 또는 공포심을 일으켜야 한다. 행위 유형으로는 ‘접근하거나 따라다니거나 진로를 막는 행위’ ‘주거·직장 등 장소에서 기다리거나 지켜보는 행위’ 등 5개를 명시하고 있다. 이 모든 요건에 맞는 행위를 지속적·반복적으로 해야 법상 스토킹 범죄로 인정된다. 서혜진 변호사는 “스토킹 범죄는 피해자가 누구인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IT 기술의 발달 등에 따라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발생하고 있다”며 “현재 법 정의만으로는 빠르게 변화하고 창의적으로 발전하는 스토킹 행위를 다 규제할 수 없다”고 했다.
스토킹 범죄가 재발할 우려가 있을 때 취할 수 있는 긴급응급조치나 잠정조치가 피해자 보호에 불충분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행법상 스토킹 범죄의 재발 가능성이 있을 때 서면 경고, 스토킹 가해자의 100m 이내 접근 금지, 휴대전화 등을 이용한 통신 금지, 경찰 유치장 또는 구치소 유치를 할 수 있는데, 이 조치들은 경찰이 신청하고 검사의 청구를 거쳐 법원이 결정하는 구조이다. 피해자가 법원에 직접 신청할 수 없기 때문에 검경이 적극적인 의지를 갖지 않으면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다. 경찰과 검찰이 청구한 것을 법원이 기각하는 경우도 있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이날 공개한 자료를 보면, 스토킹처벌법 시행 이후 잠정조치 건수 5788건 중 17%(992건)가 기각됐다.
조치 기간은 상당히 짧다. 긴급응급조치 기간은 1개월을 초과할 수 없다. 잠정조치 중 서면 경고, 접근 금지, 통신 금지는 회당 2개월 범위에서 2번 연장해 최대 6개월까지 할 수 있다. 유치장 유치는 1개월까지만 할 수 있다. 그런데 스토킹 가해자의 수사·재판은 6개월 내 종료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상당수 피해자가 수사·재판 과정에서 가해자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다. 가해자가 잠정조치를 어기면 처벌받지만 긴급응급조치를 어기면 처벌받지 않는 것도 허점이다.
■뒤떨어진 수사기관·법원 인식도 문제
수사기관과 법원이 스토킹 범죄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경찰 단계에서 잠정조치를 한 뒤 검찰로 사건이 넘어갔는데 검찰에서 조치 기간 만료 시점을 챙기지 않아 연장을 놓치는 식이다. 서혜진 변호사는 “스토킹에 대한 수사기관의 전문성이 상당히 떨어졌는데, 피해자 안전을 위해서는 경찰과 검찰이 권한 다툼을 넘어 절대적인 협력과 공조를 해야 한다”며 “피해자가 직접 조치를 청구할 수 있는 보호 명령 체계를 고민해볼 필요도 있다”고 했다. 형사소송법은 법원이 구속영장 심사 때 범죄의 중대성과 재범의 위험성, 피해자 위해 우려를 고려해야 한다고 규정하지만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가해자의 구속영장은 법원에서 기각됐다. 이 역시 스토킹 범죄를 경미하게 보는 법원의 인식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다.
이 문제는 다시 반의사불벌죄와 얽힌다. 한민경 교수는 수사기관이 가해자를 기소해도 재판 단계에서 피해자가 처벌불원을 표시해 공소기각이 되면 수사기관에도 부정적인 학습효과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분석한다. 한 교수는 “스토킹 범죄 발생 시 긴급응급조치와 잠정조치를 취하기 위해 수사기관이 법원에 제출하는 서류는 1건당 평균 100페이지가 넘는다”며 “행정력이 지속적으로 소요되는데 3건 중 1건꼴로 공소 기각이 된다면 일선에서는 ‘불원의사 표시 하나로 원점이 된다’는 생각에 사건 처리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범죄로 공식 인정되기 전이라도 스토킹 피해자를 지원하도록 하는 ‘스토킹 피해자 보호법’은 여성가족부가 지난 4월 정부안으로 입법발의했지만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이 터진 뒤인 이날에서야 국회 여성가족위원회가 심사를 시작했다. 성폭력의 경우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성폭력 피해자에게 법률상담, 수사지원 등을 하도록 성폭력방지법이라는 법적 근거를 갖추고 있지만 스토킹에 대해서는 이런 체계가 미흡하다.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 스토킹 피해자는 가정폭력·성폭력 피해자에 준해 지원이 이뤄지고 스토킹 피해를 전담하는 지원기관이 없다”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정보를 피해자에게 맞춤형으로 제공하고, 담당자들이 전문성을 갖추도록 법 제도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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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유경선 기자 lights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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