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한 경작지를 '방치'했다..'야생'이 불러온 놀라운 기적[책과 삶]
이저벨라 트리 지음·박우정 옮김|글항아리|504쪽|2만5000원
현대식 농업에 헌신했던 영국 넵 캐슬의 부부
돌아온 건 곡물가 폭락과 병약해진 나무들
소와 농기계 처분하고 자연에 주도권 넘겨
재야생화의 시작, 나이팅게일과 멧비둘기가 돌아왔다
땅을 황무지로 방치한다는 비난···
오히려 식량생산은 집약농업시절과 같아
부부의 실험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원점에서 재검토할 기회를 제공한다
영국에서 거의 사라진 나이팅게일의 요란하고도 아름다운 아리아 소리가 돌아오고, 30년 뒤엔 멸종할 것으로 예측되던 멧비둘기가 둥지를 틀었다. 꽃의 꿀 대신 썩어가는 고기를 먹는 번개오색나비 떼가 나타나 수컷들이 화려하고도 공격적인 구애의 춤을 추기 시작했다. 고대의 느낌을 풍기는 손바닥 같은 거대한 뿔을 가진 다마사슴 떼가 관목을 뜯어먹고,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말의 하나인 엑스무어 당나귀 떼가 힘차게 질주한다. 멧돼지를 닮은 탬워스 돼지들은 생물들이 살기 어려운 습지를 파헤쳐 공기가 통하는 보슬보슬한 땅으로 만들어 놓는다.
한때 집약식 농업의 경작지였던 영국 동부의 웨스트서식스주 넵 캐슬의 변화는 ‘혁명적’이다. 넵 캐슬은 트랙터가 땅을 뒤엎고, 화학비료와 제초제, 살진균제가 살포되던 땅이었다. 농장에서 홀스타인 젖소가 하루에 한 마리당 22ℓ의 우유를 생산했다. 한때 이곳에서 생산된 아이스크림이 백화점 매장과 극장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하지만 1999년 이곳은 ‘한계점’에 도달하고 있었다.
서식스 지역은 옛 방언에 진흙을 가리키는 30가지 단어가 존재할 정도로 질퍽한 땅을 지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집약농업이 도입됐고, 넵 캐슬의 소유자 찰리 버렐과 이저벨라 트리 부부는 현대식 농업에 헌신했다. 국가에서 지급한 농업보조금으로 곡물 생산이 증가하면서 곡물 가격은 하락했다. 이들의 ‘로컬 아이스크림’은 미국 하겐다즈의 공격적 마케팅의 위세에 밀려났다. 생산성은 다른 비옥한 토양을 가진 곳을 따라갈 수 없었다. 아시아, 러시아, 오스트레일리아, 아메리카에서 등에서 생산되는 저렴한 곡물은 이들의 경쟁력을 더 약화시켰다. 넵 캐슬에서 ‘현대식 농업’은 실패했다.
1999년 찰리와 이저벨라는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불어나는 적자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실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전진하던 방향을 180도 틀기로 했다. 농사에 부적합한 땅에 현대식 농사를 짓기 위해 헌신했지만, 남은 것은 파산뿐이라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자연을 내버려두기로 한다. 맹렬히 제압하고 통제하기 위해 애쓰던 땅을 ‘방치’한다.
이 모든 것은 병약한 참나무에서 시작됐다. 550년 된 참나무는 뻗어나간 거대한 나뭇가지 때문에 쪼개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바닥으로 늘어지는 나뭇가지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수목전문가 테드 그린의 말은 달랐다. 나무는 항상 자세를 바꾸고 무게중심을 잡으며 환경과 주위 초목들의 성장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상부가 무거워서 균형을 잡지 못하면 나뭇가지를 땅에 드리워 버팀대로 삼는다. 테드는 “우리에겐 나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가 있어요”라고 말한다.
한때 존 왕의 소유였던 넵 캐슬은 참나무가 우거진 곳이었다. 참나무엔 300종이 넘는 지의류가 있다. 알락딱새, 오색딱따구리 등 새들에게 먹이를, 박쥐들에게 둥지를 제공했다. 숲의 생태계를 지탱하는 거대한 집과 같았다. 고목이 썩으면서 이를 분해하는 찰진흙버섯, 수지불로초 등 현재엔 찾아보기 힘든 균류가 생겨난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식량 생산이 장려되며 집약농업이 도입되고 나무들이 베어졌다.
테드는 넵 캐슬의 병든 참나무에서 찰진흙버섯을 찾아냈다. 참나무는 선조로부터 9세기 동안 이어온 생명연속성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앙상한 가지를 드리운채 ‘궁지에 몰린 난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들 부부는 참나무들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보호하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모든 것이 바뀌었다. 소들을 팔고, 농기계들을 처분한다. 집약농업이 이뤄지기 이전의 ‘대정원’을 복구하기로 결정한다. 타이밍이 좋았다. 낙농장을 닫은 지 1년도 안 돼 우윳값이 급락해 거의 무가치해졌고, 2001년 발병해 1년간 영국의 낙농업과 정육점을 마비시킨 구제역의 고통도 피해갈 수 있었다.
이들은 땅을 자연에게 맡기고, 존 왕이 사냥했던 다마사슴 떼를 들여놓는다. 다마사슴은 땅에 새로운 풍경을 부여했다. 평소에 부드럽게 풀을 뜯던 사슴 떼는 번식철이 되면 수컷들이 내뿜는 페로몬의 악취와 격렬한 몸싸움 등으로 소란스러워졌다. ‘재야생화’의 시작이었다. 이어 엑스무어 조랑말, 옛 잉글리시 롱혼 소들, 원시 멧돼지와 비슷한 탬워스 돼지들이 추가로 도입됐다. 새로운 동물의 도입은 생태계에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자연에 주도권을 넘기고 자신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자 자연은 놀라운 회복력과 인간의 사고한계를 넘어서는 생산성을 가져왔다.
재야생화된 3500에이커의 땅은 2009년까지 시급히 보호해야 할 15종의 동물들(박쥐 4종과 조류 11종)을 포함해 보존 중요성이 있는 60종의 무척추동물을 불러들였다. 2009년에 76개의 새로운 나방 종이 이 땅에 흘러들어와 현재 총 276종의 나방이 서식한다. 쇠백로, 알각해오라기, 삑삑도요 등 찾아오는 새들도 늘었다. 나이팅게일과 멧비둘기는 ‘재야생화’의 상징이 됐다. 산업화 이후 자취를 감춘 새들이 둥지를 틀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1967년에서 2007년 사이 영국에서 나이팅게일의 개체 수는 91%나 줄었는데, 이제 살아남은 나이팅게일의 상당수가 넵 캐슬에 둥지를 틀고 있다. 멧비둘기는 영국 전역에서 5000쌍이 채 되지 않지만 이곳에서 노래하는 멧비둘기 수컷이 16마리나 발견됐다.
‘재야생화’는 이미 유럽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저자 부부에게 영감을 준 것은 네덜란드의 오스트파르더르스플라선이었다. 암스테르담에서 불과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이곳은 산업용으로 조성된 간척지였지만 1973년 석유 파동과 경기 침체로 쓸모를 잃었다. 자연이 기회를 차지했다. 습지 식물들이 자리잡으면서 새들이 찾아왔다. 서유럽에서 멸종 위기였던 흰꼬리수리가 이곳에 번식했다. 흰꼬리수리는 산악지대에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졌기에 이곳에 흰꼬리수리가 둥지를 틀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네덜란드 생태학자 프란스 페라는 “인간이 바꿔놓은 세상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꼭 야생생물이 선호하는 환경이 아니라 그들이 적응해야 하는 황폐해진 남은 땅”이라며 “종들은 실제로 그들과 맞지 않는 조건에 매달려 서식 범위의 한계점에서 버티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최소한의 개입. 자연이 스스로를 드러내게 놔두는 것. 그러면 우리가 전혀 모르는 환경이 탄생합니다.” 넵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번개오색나비와 나이팅게일도 삼림지에만 사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관목과 잡풀, 습지, 나무들이 모자이크처럼 자리잡은 넵에서 이들은 살기 시작했다.
인간이 생각하는 ‘자연스러운’ 풍경과, 실제 자연은 달랐다. 유럽의 숲 하면 떠오르는 빽빽한 나무로 우거진 ‘울폐산림’은 산림을 인위적으로 조성하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실제로는 불규칙적 관목과 독립적인 나무가 어우러진 ‘황무지’의 이미지에 가깝다고 말한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황무지를 싫어했다. 농부의 게으름과 나태의 상징과도 같았다. 책은 “쓸모없다고 여겨진 관목은 20세기 악마 취급을 받았다. 우리는 질서정연함과 경계에 집착하는 국민이 되었다”며 “완만한 언덕과 흘러가는 강을 배경으로 나무와 잡목림이 흩어져 있고 깔끔한 생울타리로 둘러싸인 들판”의 모습이 황무지의 정보자이자 자연을 굴복시키는 인류라는 개념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관목은 새들에게 열매를 제공하고 참나무의 어린 묘목을 초본초식동물로부터 보호해준다. 하지만 ‘미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넵의 무질서를 싫어했다. 이번에도 ‘자연’이 넵을 구했다. 번개오색나비, 나이팅게일, 멧비둘기가 이들 지역에 살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호감도 높아졌다. 영국 정부의 지원으로 ‘재야생화’ 프로젝트를 지속할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들은 야생화 지역을 더욱 확장하고, 끊어진 에이더강을 복원했다. 강이 복원되자 땅은 다시 천연 스펀지 역할을 해 물을 저장하고 하류의 갑작스러운 홍수를 막게 됐다.
수치적으로도 이들의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영국 환경식품농무부에서 넵의 ‘생태계 서비스’를 평가한 결과 탄소격리, 휴양, 미학, 홍수 방지, 식량 공급, 에너지·연료, 원자재·섬유, 신선한 물 모든 측면에서 우수한 점수를 받았다. 이는 집약농업 시절보다 더 우월한 것이었다. 집약농업 시스템에서 넵은 탄소격리 1점, 휴양 3점, 미학 5점, 홍수 방지 1점, 식량 공급 5점, 에너지·연료에서 2점, 원자재 섬유에서 3점, 신선한 물에서 2점을 받았다. 재야생화 시스템에서는 대부분 점수가 올랐다. 홍수방지 4점, 원자재·섬유 4점을 제외한 다른 항목은 모두 5점이었다. ‘재야생화’가 환경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식량 공급 면에서도 효율적임을 보여줬다.
넵 캐슬의 재야생화는 단순히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낭만적 주장을 펼치지 않는다. 인간과 자연이 맺는 관계를 전면적으로 되돌아보며, 현재 그 관계의 실패가 초래한 파국의 대안이 존재함을 실질적으로 보여준다.
저자는 집약농업이 이제 그 유효성을 다 했음을 강조한다. 영국의 집약농업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식량공급에 대응하기 위해 시작됐다. 하지만 이제 식량생산은 수요를 초과한 지 오래다. 이미 세계 인구 전체를 먹여살리기고도 남는 식량이 생산되고 있다. 보조금과 과잉 생산으로 인한 낮은 상품 가격 때문이다. 매년 6억7000만t의 식량이 낭비된다. 곡류가 남아돌자 농업 종사자들은 곡류를 이용한 바이오디젤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바이오디젤은 실제 화석연료 디젤보다 기후에 80% 더 나쁘다고 과학자들은 지적한다. 농업생산성이 엄청나게 향상되면서, 2030년까지 유럽에 버려진 농지는 300만㏊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저자는 “우리 땅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편견만 극복할 수 있다면 자연에게는 전례 없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과 동물이 맺는 관계도 새롭게 구성된다. 송아지들은 태어난 지 사흘만에 어미에게서 분리돼 기계에서 공급되는 분유를 먹다가, 18~20주부터 송아지고기가 되기 위해 도살된다. 젖이 많이 나오도록 개량된 홀스타인 젖소는 매일 평균 22ℓ의 우유를 생산하고, 유선염에 고통을 겪는다. 하지만 넵의 잉글리시 롱혼들은 송아지를 위해 하루 3~4ℓ의 젖만 생산하면 충분했고, 송아지들은 성체의 크기가 될 때까지 어미의 젖을 먹을 수 있다.
넵 캐슬의 ‘재야생화’는 진행 중이다. ‘야생 방목’한 유기농 육류를 생산하고, 야생생물 사파리로 관광사업을 시작했다. “자연적 과정들로 시스템을 재구축하며 결과만큼 기능을 평가한다면 땅과 우리의 모든 관계를 바꿀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우아한 다마사슴의 뿔과 아름다운 나이팅게일의 노랫소리만큼 매혹적으로 들린다. 기후위기의 시대,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관계를 재구축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사고의 전환점을 제공한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대통령실 “김 여사, 다음 순방 동행 않기로”…이후 동행 여부는 그때 가서 결정
- 명태균 “청와대 가면 뒈진다고 했다”…김건희에게 대통령실 이전 조언 정황
- 김예지, 활동 중단 원인은 쏟아진 ‘악플’ 때문이었다
- 유승민 “역시 ‘상남자’···사과·쇄신 기대했는데 ‘자기 여자’ 비호 바빴다”
- [제주 어선침몰]생존자 “그물 들어올리다 배가 순식간에 넘어갔다”
- [트럼프 2기] 한국의 ‘4B’ 운동이 뭐기에···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서 관심 급증
- ‘프로포폴 불법 투여’ 강남 병원장 검찰 송치···아내도 ‘중독 사망’
- 서울대 외벽 탄 ‘장발장’···그는 12년간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다
- 주말 서울 도심 대규모 집회…“교통정보 미리 확인하세요”
- 조훈현·이창호도 나섰지만···‘세계 유일’ 바둑학과 폐지 수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