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1뷰]高물가 시대 왜 쌀값만 폭락했을까?
단발성 정책 아닌 재배면적 줄이는 등 중장기 대안 필요
[편집자주] 기자(記者)는 말 그대로 기록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기자란 업의 본질은 ‘대신 질문하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뉴스1뷰’는 이슈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이 더 이상 남지 않도록 심층취재한 기사입니다. 기록을 넘어 진실을 볼 수 있는 시각(view)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전국=뉴스1) 양희문 기자 = “국민 먹거리를 제공한다는 책임감으로 쌀농사를 지으면서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후회스럽습니다. 모든 물가가 올랐는데 쌀값만 폭락했습니다. 지난해 가격이랑 같아도 적자인데 오히려 떨어졌으니 막막합니다.”(전남 화순군 농민 김모씨)
“쌀은 전략자원이기 때문에 국가가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쌀값 폭락 사태는 정부 책임이 큽니다. 정부는 쌀 생산량이 많다면서 한 해 40만톤이 넘는 쌀을 수입하고 있습니다.”(오용석 전국농민회총연맹 강원도연맹 의장)
국제 정세 불안 등으로 식료품과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고 있지만 쌀값은 폭락을 거듭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5일 기준 산지 쌀값은 20㎏당 4만1185원으로 조사됐다. 작년 같은 기간(5만4758원)보다 24.8% 하락했다. 이는 통계청이 관련 통계를 내놓은 1977년 이후 45년 만에 최대 하락폭이다.
◇ 고물가 시대 왜 쌀값만 폭락했을까?
시장 가격은 수요와 공급 원칙에 의해 결정된다. 쌀값도 마찬가지다. 매년 연간 소비량보다 많은 쌀이 생산되고 있다. 지난해 쌀 생산량은 388만톤으로 추정 수요량 361만톤에 비해 27만톤이나 과잉 공급됐다. 여기에 WTO(세계무역기구) 가입에 따라 매년 40만8700톤을 의무적으로 수입하고 있다.
이 탓에 쌀 재고는 계속 쌓여가고 있다. 지난 7월 말 기준 공공비축미는 105만톤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 82만톤보다 21.9% 늘었다. 전국 농협 쌀창고에 쌓아둔 구곡도 포화 상태다. 지난 8월 기준 전국 농협 쌀 재고량은 31만3000톤으로 전년 동기 15만4000톤보다 103% 많다. 최근 10년 내 최고 수준이다.
공급 대비 수요는 감소하고 있다. 지난해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56.9㎏으로 전년(57.7㎏)보다 0.8㎏ 줄었다. 올해는 54.1㎏까지 하락할 전망이다. 2012년 이후 최저다. 한 해 평균 380만톤의 쌀이 수확되는 등 공급은 그대론데 수요는 감소하니 가격 방어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 농민들 “안일한 정책 쌀값 하락 원인”
농민들은 이번 쌀값 폭락 사태에 대해 정부 책임이 크다고 주장한다. 쌀은 중요한 전략자원이지만 정부의 안일한 대처가 이 같은 사태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농림축산식품부가 쌀값 하락에 대응하기 위해 실시한 논 타작물 재배 지원사업이 있다. 이 사업은 논이라는 틀은 유지하되 벼 대신 콩, 밀 등 다른 작물을 재배할 수 있게 지원하는 것으로, 2018년부터 3년간 한시 시행됐다.
사업 이후 쌀값은 안정되는 것처럼 보였다. 9월 초 기준으로 2017년 20㎏당 3만2700원하던 쌀 도매가는 2018년 4만6320원, 2020년 5만580원으로 올랐다. 농식품부는 쌀값이 안정됐다고 판단하고 사업을 끝냈다.
농민들은 농식품부가 성급한 판단을 내렸다고 지적한다. 2020년 쌀값 상승은 시장 공급 조절로 인한 가격 형성이 아닌 54일간 중부지방에 이어진 장마로 인한 흉작으로 공급이 불안정해 가격이 올랐다는 것이다. 따라서 적정가 형성까지는 좀 더 지켜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기 가평군에서 벼농사를 짓는 안모씨(58)는 “해당 사업 시행 이후 쌀값이 안정되고 있었는데 2020년 쌀값이 급격히 상승했다고 사업을 중단한 농식품부 결정을 납득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여기에 농가소득 안정을 위해 정부가 정한 목표가격에 쌀값이 미치지 못할 경우 차액의 85%를 지원하는 쌀 변동직불제 폐지와 WTO 가입으로 인한 수입산 쌀 의무 수입 역시 문제라고 말한다.
◇ 단발성 정책 아닌 중장기적 대안 필요
정부는 쌀값 하락을 막기 위한 정책을 내놓고 있다. 먼저 지난달 30일 국회회의를 통해 2022년 공공비축미 45만톤 매입 계획을 확정했다. 매년 35만톤 정도 사들였는데 올해는 10월 햅쌀 출하를 앞두고 가격 하락이 계속되자 10만톤을 늘렸다. 이에 따라 12월31일까지 통계청이 조사한 산지 쌀값 평균 가격을 기준으로 쌀을 매입할 계획이다.
또 정부는 2021년산 쌀을 올해 들어서만 2월 14만4000톤, 5월 12만6000톤, 7월 10만톤 등 세 차례에 걸쳐 모두 37만톤을 사들여 시장에서 격리했다.
하지만 단발성 정책은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급 과잉이 쌀값 하락의 주요 원인이기 때문에 생산량을 줄이는 등 중장기적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다.
실제 올해 벼 재배면적은 72만7158㏊로 지난해 73만2477㏊와 비교해 0.7%(5319㏊) 줄어드는 데 그쳤다. 이에 따라 전년도와 비슷한 수준인 380만톤 안팎의 쌀이 출하될 것으로 추정된다. 매년 이 같은 상황이 이어질 경우 농가와 정부 모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결국 쌀 시장격리 조치는 한계가 있다. 2020년을 끝으로 중단된 논 타작물 재배 지원사업 재개를 통한 점진적인 벼 재배면적 축소 등의 대안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최영식 한국농업경영인 중앙연합회 수석부회장은 “국내 곡물 자급률이 30% 수준밖에 안 되는데 쌀값은 폭락하고 있다. 국가적으로 큰 문제”라며 “타작물 재배 유도, 쌀 수입물량 제한 등을 정부에 건의했고, 국회에서도 논의 중이다. 만약 건의사항이 통과되지 않으면 10월 대규모 집회를 열 계획이다”고 말했다.
yhm95@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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