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꾸미지 않은 야생, 받아들일 준비 됐습니까
적자 농사 포기하고 재야생화 실험
숲 조성 대신 자연의 재생력에 집중
20년 만에 멸종 위기 동식물 터전 돼
야생 쪽으로
이저벨라 트리 지음, 박우정 옮김 l 글항아리 l 2만5000원
고풍스러운 중세 성이 곳곳에 서 있는 영국 남부 웨스트서식스주에는 여의도 다섯배 넓이(14㎢)의 거대한 숲이 있다. 영국은 시민의 힘으로 자연경관을 보존하는 내셔널 트러스트의 본고장이라 잘 보존된 숲을 찾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 숲은 사유지라는 점 말고도 여느 숲과는 큰 차이가 있다. 녹음이 우거진 숲처럼 아름답기보다 차라리 황량해 보이는 이곳에서는 보존과 복원을 넘어서 ‘재야생화’(rewilding)라는 실험이 수십년째 진행되는 중이다.
“자연이 주도권을 쥘 수 있게 놔둠으로써 야생을 회복하는 것.” ‘넵 황무지 프로젝트’ 관리자이자 작가인 저자는 재야생화의 의미를 이렇게 쓴다. <야생 쪽으로>는 수백년간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애써온 인간이 20년 동안 이 주도권을 자연에 돌려주기 위해 벌인 분투와 이 노력이 가져온 놀라운 변화를 기록한 책이다.
재야생화라는 말은 그리 어렵게 들리지 않는다. 화학비료를 사용해 황폐해진 땅을 유기농화하고 농작물 대신 나무를 심어 울창한 숲을 만들면서 사라졌던 동물들을 다시 불러들이게 되는 과정 아닐까? 과연 그럴까? 12세기에 넵 캐슬을 짓고 영지를 관리해온 조상으로부터 이 거대한 땅을 물려받은 저자의 남편과 저자는 묻는다. 야생이란 무엇인가. 과연 우거진 숲이 진정한 야생일까. 이런 질문에서 출발한 재야생화 실험은 영국을 넘어선 주목을 받으며 동시에 지금까지 여러 가지 논쟁의 지점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1987년 젊은 찰리 버렐이 3500에이커나 되는 이 땅을 물려받을 때 재야생화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적자에 시달리는 농장의 수익 개선에 몰두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승리를 위한 경작’ 캠페인이 벌어지며 목초지에서 경작지로 변신한 이 땅은 한동안 그 소임을 다했다. 하지만 갈수록 식량 생산은 너무 늘어났고 이에 따라 가격은 자주 폭락했으며 운영 비용은 높아졌다. 젊은 지주 부부는 경영 합리화를 위해 새로운 농기계를 도입하고 젖소의 종을 바꾸고 직접 아이스크림까지 만드는 등 사업 다각화를 꾀했으나 “세기가 끝날 무렵 우리는 실패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정부의 후한 농가보조금은 결단 시기를 늦춰줬을 뿐이었다.
“저 나무들을 죽이고 있는 건 쟁기질과 쟁기질에서 비롯된 모든 것이에요.” 퇴로를 고민하던 부부가 1999년 만난 ‘귀인’ 테드 그린은 재야생화에 결정적 영감을 줬다. 식물학자이자 왕실 소유 공원 나무 관리인 출신인 그린은 농부에게도 환경주의자들에게도 찬밥 대우를 받는 참나무, 즉 관목의 가치를 설파했다. 도토리가 싹을 틔워 자라는 참나무는 키는 작고, 가지는 옆으로 뻗어가며 햇빛이 없으면 살지 못해 쓸모없는 나무로 통하지만 흙을 살지게 하는 균류와 곤충, 지렁이 같은 무척추동물, 사슴 등 초식 동물들의 집이자 놀이터이자 먹이였다. 부부는 관목에 재야생화의 첫번째 운전대를 맡겼다. 화학비료 투입을 중단하자 비실거리던 관목들이 살아났고 죽은 관목조차 딱정벌레 등 무척추동물들의 서식지가 됐다. 오색딱따구리들이 곤충 유충을 찾아와 나뭇가지를 쪼았고 왜가리가 가지에서 휴식을 취했다. 짧은꼬리밭쥐는 나무뿌리의 산토끼 번식지에 자리 잡았고 그 주변을 붉은 수여우가 어슬렁거렸다. 사라졌던 생태계 사슬이 불과 몇 년 사이에 복원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관목이 제멋대로 자라는 숲은 우리가 떠올리는 원시 자연림과는 전혀 다른, 들판이나 초원에 가깝다. 넵 캐슬보다 먼저 유사한 생태 실험을 한 네덜란드 오스트파르더르스플라선의 생태학자 프란스 페라와 저자 부부는 곧고 길게 자란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울폐산림이 문명화 이전의 원시림이라는 데 의문을 가진다. 영국과 유럽 전역에서 발견되는 대형 동물들의 화석으로 유추했을 때 본래의 자연은 이들이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풀을 뜯을 수 있는 초원과 관목지대, 작은 숲이 흩어져 있는 툭 트인 풍경에 가까웠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저자 부부가 나무 심기에 나서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자연에 주도권을 주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자연으로 넘어온 주도권을 먼저 포착한 잡초는 이웃들을 분노케 한 대표적 난제였다. 특히나 평생 땅을 다듬고 갈면서 잡초를 제거하는 데 시간과 돈을 써온 부지런한 농부들은 “엄청난 실망”을 넘어 “완전한 재난”이라고 이 프로젝트를 맹비난했다.
부부가 손 놓고 자연이 저 혼자 알아서 하기만을 기다린 건 아니다. 자생 식물들을 여러 번 베어내면서 토양에 스며든 화학비료의 질산염과 인산염을 빼내는 게 첫번째 작업이었다. 토양이 복원되고 사라졌던 식물, 곤충들이 돌아오면서 영국인들의 추억과 문학 작품 속에만 남겨졌던 나이팅게일, 멧비둘기 들도 날아오기 시작했다. 저자 부부는 다마사슴과 잉글리시 롱혼 소, 엑스무어 조랑말, 탬워스 돼지 등을 순차적으로 들여왔다.
언뜻 재야생화를 거스르는 인위적 개입처럼 보이지만 새나 곤충과 달리 대형 동물들은 스스로 찾아오는 게 불가능하다. 지속가능한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대형 동물을 들여오는 건 불가피한 개입이었다. 생태계 피라미드의 완성을 위해서는 대형 초식 동물의 개체수를 조절할 수 있는 포식 동물도 필요하지만 이 부분은 넵 황무지 프로젝트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과제다. 아무리 넓은 숲이라고 해도 늑대나 곰 등 포식 동물을 사유지로 들여오는 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신 부부는 개체수가 포화에 이른 소들을 도축하고 말은 거세하는 식으로 일종의 타협점을 찾았다.
책은 단순히 자연이 되살아나고 멸종 위기의 생물들이 돌아오는 과정의 감동을 넘어 생태 파괴와 기후 위기, 동물권, 나아가 자연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자연을 사랑하고 숲의 회복을 지지한다는 믿음에 아름다운 엽서 같은 풍경만 포함된 건 아닌지, 때로 참기 힘든 자연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더 많은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당하면, 그때 오세요” 스토킹 살인 직감할 때 국가가 말했다
- 신당역 찾은 여가부 장관 “여성혐오 범죄 아니다”
- 수도권 신축 월 32만원, 1% 임대료 상승률…어떻게 가능했나
- 30년 뒤, 여성 인구가 남성 앞지른다
- 태풍 ‘난마돌’ 한국 최근접 19일…일본 가지만 경상해안 큰비
- 이원석 검찰총장, ‘외풍’ 뚫고 검찰 중립성·공정성 지킬까
- 신당역 살인범, 거짓말로 내부망 접속…피해자 위치 알아냈다
- 대통령실 878억 신축…“수해엔 200만원 지원, 도배조차 못 해”
- 한심한 교통공사 “신당역 사망 대책 써내라…총리 지시라 긴급”
- 시각장애 아빠 몰래 5천 대출…“비대면 거래, 카드사 책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