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러시아는 사이가 좋았을까?
[김홍중 원광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연구교수]
중국의 급속한 경제적 부상으로 미국의 견제 강도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2020년 화웨이 제재를 시작으로 미국은 거세게 중국을 압박하면서 경제와 외교영역에서 '가치동맹' 아래 자국 이익 중심의 세계 질서와 패권 유지를 꾀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경제적 압박 속에서 중국의 최대 우방국이 러시아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자원 부국 러시아와 경제 대국 중국의 협력은 현재로서 서방 세계의 어떤 견제와 제재에도 흔들리지 않는 듯하다.
같은 이념에 기반한 국가였지만 소련과 중국은 왜 서로 적대적이었을까? 여러 원인을 꼽을 수 있겠지만 이 두 국가는 역사적으로 협력과 대립을 반복해왔고, 그 주된 배경으로 지경학적, 지정학적 갈등을 들 수 있다.
중국과 러시아의 첫 조우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639년 시베리아 동쪽에서의 러시아와 청나라의 무력 충돌이다. 한국에서는 '나선정벌'이라는 부적절한 용어로 부르는 이 무력 충돌의 공식 명칭은 '청-러시아 국경분쟁(雅克萨战役)'이다.
그 후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인해 동북아시아 영토의 구획이 이루어진다. 이때 동시베리아의 청과 러시아의 국경이 스타노보이 산맥 북쪽으로 정해졌는데 산맥 아래의 흑룡강 유역과 연해주 지역은 청의 영토로 결정되었다.
스타노보이 산맥 북쪽은 아한대 기후로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대규모의 인구가 살 수 없는 불모의 땅이었지만 당시 러시아가 원했던 모피 공급처로는 부족함이 없었다. 러시아의 동진은 대항해시대가 촉발한 세계화로 인한 상업적 목적이 컸었다. 유럽 국가들의 주교역품이 향료였다면 러시아의 주교역품은 모피였던 것이다.
그래서 동시베리아에 대규모 병력을 투사할 수 없었던 러시아의 입장에서 네르친스크 조약은 스타노보이 산맥 북쪽의 영토를 확보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이후 러시아는 오호츠크해, 캄차트카 반도, 그리고 베링해를 통해 일본이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네르친스크 조약은 청에게도 불평등 조약이 아니었다. 동시베리아에서 러시아와 국경 문제를 해결한 청은 17세기 말 몽골지역과 지금의 신장 위구르 지역으로 적극적으로 진출하면서 중앙아시아를 도모했었고, 18세기 말에는 네팔까지 영향력을 확장했다. 결국 청과 러시아의 국경협정은 끊임없이 확장을 추구했던 두 국가 간 타협의 산물이었다.
북쪽 지역에서 청과 대립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세력이었던 러시아와의 타협함으로써 청은 안정적으로 몽골과 중앙아시아로 영향력을 넓힐 수 있었다. 중국의 전통적인 영토가 아니었던 티벳이나 신장 위구르, 내몽골 지역은 청의 정복 활동 덕분에 지금 중국의 땅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청과 러시아 국경의 변화는 19세기 중반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서구 열강에 의해 청이 혼란을 겪으면서 국권을 침탈당할 때 일어났다.
네르친스크 조약 이후 200여 년이 채 되지 않은 1858년에 러시아는 아편 전쟁으로 혼란한 청을 상대로 아이훈 조약을 맺어 네르친스크 조약을 뒤집었고 러시아와 청의 국경을 아무르강으로 정했다.
또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는 우수리강이 흐르는 비옥한 연해주 지역마저도 차지해 현재 러시아 동북아 영토 대부분을 확정 지었다. 연해주 지역은 러시아의 극동지역에서 유일하게 농업이 가능한 지역이어서 대규모 인구가 거주할 수 있으며,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태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
연해주를 차지한 뒤 곧바로 러시아는 이 지역에서 만주족과 한족을 배척했고, 대신 러시아인과 유대인, 조선인 이주를 추진해 자신들의 통치 기반을 확보하려 했다.
러시아와 청의 갈등은 동북아시아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에서도 있었다. 1755년 청은 숙적인 몽골계 국가인 준가르 칸국을 정벌했는데, 이곳은 동투르케스탄, 즉 지금의 신장 위구르 지역이다.
청은 끈질기게 저항한 준가르의 몽골 오이라트인들을 집단 학살했고, 신장 지역에 위구르 인들을 이주시켜 자신들의 통치권을 확립하려 했다. 문제는 오이라트의 일부인 칼미크 인들이 러시아 제국에 일부 살고 있었고, 준가르 칸국과 러시아의 국경이 정확하게 구획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투르케스탄의 서쪽 지역 일부인 일리강 유역을 러시아가 차지했고, 1881년 이리조약(伊犁條約, 또는 상트페테르부르그조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1875년 일본과의 상트페테르부르그 조약과는 다르다)을 통해 지금의 카스시(喀什) 일대가 중국에 반환됐다.
하지만 지금은 카자흐스탄에 속하는 준가르의 영토 일부가 러시아 제국에 남겨졌는데 이 지역은 1950년대 중국과 소련의 군사 국경 분쟁을 야기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중화민국과 동맹국이었던 소련은 중국공산당과 중화민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했고,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소련과 관계 악화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외교적 문제가 일시적이라면 영토 문제는 끊임없이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스탈린 사후 표면화된 중-소간의 갈등은 1969년에 결국 영토를 둘러싼 국지전까지 이르렀다. 극동지역의 전바오섬(다만스키섬)과 중앙아시아의 잘라나시콜 호수와 둘라티 마을에서 소련군과 중국군 사이에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이 무력 충돌은 전면전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핵 무력 시위가 수반될 정도였고 이 충돌은 중국이 미국과 가깝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지금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에서 이런 국경 분쟁의 징조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1972년 상하이 코뮈니케 이후 30여 년 이상 지속된 중국과 미국의 밀월이 끝나고 군사적, 경제적 적대감이 고양되고 있듯이, 2001년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해 결성한,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그 결속력이 강한 상하이 협력기구의 미래 역시 언제 변화할지 알 수 없다.
중소 국경 분쟁 발생 이전 1960년대 초 중국은 소련에 러시아 제국 시절 체결한 아이훈 조약과 베이징 조약을 철회하고 새로운 국경 조약을 맺을 것을 제안했다. 물론 소련은 즉각 이 제안을 거부했지만, 중국이 불평등조약으로 빼앗긴 극동지역을 잊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됐다.
동북아시아의 잠재적 국경 분쟁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 바로 연해주 지역이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의 경제성장으로 중러 국경 지역의 러시아 도시들은 급속도로 중국의 경제적 영향권에 놓이고 있다.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러시아의 극동 지역과 바이칼 주변 도시에 4년 이상 장기 거주 중국 사업가들의 비율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서방의 경제제재로 인해 지금 연해주 지역에는 중국 열풍이라고 부를 정도로 중국인 사업가들의 진출이 유례없이 활발하다.
하지만 영토 분쟁의 기억은 이 경제적 활기를 마냥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없게 하는 요인이다. 같은 이념에 기반한 국가였지만 냉전 시대에 서로 적대적이었던 소련과 중국의 관계는 결국 1972년 '상하이 코뮈니케'를 통해 중국이 미국 주도의 세계화 질서에 참여하게 만들었고, 이는 냉전시대 미소 2강 체제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역설적으로 이념의 시대가 끝난 지금의 중국과 러시아의 우호 관계는 이익 기반에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 수준이 군사 동맹이 아님을 주목해야만 한다.
[김홍중 원광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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