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찐리뷰]"내가 아들을 죽였다"는 자백..영어 못한 엄마의 자책이었다

강선애 2022. 9. 16.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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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5일 방송된 '꼬꼬무 - 이방인 엄마의 살인 고백, 295호의 비밀'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가수 백지영, 클래지콰이 알렉스, 그룹 에이프릴 출신 배우 윤채경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한국 엄마가 자기 애를 죽였대"

때는 지금으로부터 30년전인 1992년 미국. 뉴욕에 사는 한인들 사이에 '어떤 한국 여자가 백인 남편이랑 살다가 자기 애를 납치해서 잔혹하게 살인했다'는 소문이 돌았어. 이 소문은 여금현 목사의 귀에도 들어갔어.

여 목사는 그 소문이 믿기지가 않았어. 한국 사람 특성이 자기 자식에게 각별하고, 특히 교민들은 자식 잘되라고 타지에서 고생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래서 여 목사는 확인에 나섰어. 알아보니 실제로 살인죄로 20년형을 선고받은 한국 여성이 있었어. 여 목사는 도대체 무슨 사연이길래 자기 애를 죽였을까 싶어, 그 소문의 여자를 직접 만나보기로 했어.

여자가 있는 곳은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중범죄자만 수감하는 교도소야. 여 목사는 심호흡을 하고 교도소 면회실 안으로 들어갔어.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소문의 주인공이 들어왔어.

당시 나이 32세의 윤미정 (가명) 씨야. 여 목사가 윤 씨를 보기엔 가냘프고 건들면 픽 쓰러질 거 같았대. 여 목사는 조심스럽게 아들을 왜 죽였냐고 물었어. 그랬더니 갑자기 윤 씨가 소리쳤어.

"내가 아들을 왜 죽여요! 이게 다 베이비시터 때문이에요!"

다짜고짜 베이비시터 때문이래. 이게 무슨 소리일까. 자, 이제부터 엄청난 이야기를 들려줄게.

▲ "내가 아들을 죽였어요" 엄마의 자백?

윤 씨를 만나기 5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987년 5월 28일 새벽 3시 40분. 경찰서로 "우리 애 좀 살려주세요"라는 다급한 전화가 걸려 왔어. 경찰과 구조대가 곧장 출동했지. 도착한 곳은,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시골마을 잭슨빌에 위치한 콜로니얼 호텔. 말이 호텔이지, 돈 없는 사람들이 달방 생활하는 여관 같은 곳이야. 신고가 들어온 방은 2층 295호.

들어가보니 여자가 펑펑 울고 있어. 윤미정 씨였어. 침대 위에는 두 아이가 누워있어. 한 명은 만 2세의 남자아이, 한 명은 한살배기의 여자아이인데 여자아이는 자고 있어. 남자아이의 상태를 살폈는데, 맥박이나 호흡이 없었어. 피는 응고되어 있었고, 모든 관절은 이미 굳어있었어. 구조대원이 도착했을 땐 이미 늦었어. 남자아이는 사망했어.

윤 씨에게 사고 경위를 물었어. 일을 끝내고 새벽 2시에 집에 돌아왔는데, 침대에 막내 딸만 자고 있더래. 큰 애가 어디갔나 주변을 살피는데 바닥에서 지지직 거리는 소리가 났고, 깜짝 놀라 봤더니 TV가 쓰러져 있고 서랍장 밑에 아들이 깔려 있었대.

평소에 아들이 TV 채널을 돌리려고 서랍장에 자주 올라갔대. 윤 씨는 그날도 아들이 서랍장을 밟고 올라가서 TV를 만지다가 서랍장이 엎어지면서 그 밑에 깔린 거 같다고 말했어.

근데 이 말을 들은 형사는 윤 씨를 의심했어. 이게 당시 현장을 찍은 사진이야.

이 사진을 보고 뭔가 이상한 점이 없어? TV와 서랍장이 말끔히 정리 돼 있어. 아들은 침대 위에 누워있고. 넘어진 흔적이 없어. 아이가 죽었는데, 엄마가 한참 뒤에 신고하고 경찰이 오기 전에 사고 현장을 치워 놨어.

이상한 건 또 있었어. 아들의 상태야.

경찰이 아이 몸에 남은 상흔을 조사했는데, 아이의 배와 등 뒤에 길게 난 멍자국을 발견했어. 만약에 서랍장이 엎어져서 TV가 아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면, 머리에 부상을 입고 피가 흘렀겠지.

"취조 중 이상한 점들이 드러나면서 윤 씨는 진술을 여러 번 번복했습니다. 윤 씨의 진술은 신뢰를 잃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형사한테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고 했어요. 윤 씨 진술이 말이 안 된다고요." –당시 담당 경찰

경찰은 윤 씨의 신원조회를 해봤어. 그랬더니 두 아이 모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였어. 출생신고를 안 한거야. 형사들은 더 의심을 품고 윤 씨를 조사하기 시작했어.

왜 새벽 2시에 집에 들어왔는지 묻자, 윤 씨는 저녁 7시에 일터에 출근해 새벽 2시에 귀가했대. 그럼 애들은 누가 돌봐? 그냥 방안에 뒀다는 거야. 미국은 어린 아이만 혼자 집에 두는 것도 불법이야. 윤 씨는 오랜시간 아이들만 방치했어. 경찰은 수사 결과, 윤 씨의 학대로 아들이 죽었다는 결론을 내렸어.

경찰은 윤 씨가 출근할 때 아이는 이미 죽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어. 윤 씨가 아들을 혼내기 위해 서랍장에 넣고 뒤에서 밀어 닫았을 거라고, 그럼 배랑 등이 서랍장에 찍히니 아이 몸에 그런 멍자국이 날 수 있을 거라 추측했어.

실제로 아이 몸에 있던 멍 자국과 서랍의 높이를 비교해봤더니 일치했어. 경찰은 윤 씨가 아이를 학대한 후 일을 나갔고, 돌아와서 사건 현장을 말끔히 정리한 걸로 봤어.

경찰이 이런 확신을 가지게 된 이유는 또 있어. 윤 씨가 경찰서로 잡혀가면서 이런 말을 했대.

"윤 씨는 저한테 분명히 말했습니다. '자기 잘못이고, 자기가 아들을 죽였다고요'"

-현장 출동 경찰

윤 씨는 "내가 아들을 죽였습니다(I Killed my son)"라고 자백했대. 그래서 윤 씨는 그 자리에서 살인 혐의로 체포됐어. 그리고 얼마 후 재판이 열렸어. 그런데 재판장에서 윤 씨는 말을 바꿨어.

"난 아들을 죽이지 않았습니다!(I don't kill my son). 여러분에게 증명하겠습니다! 제가 증명하겠다고 얘기했습니다. 제 말 들으라고요! 질문하지 말고!"

윤 씨는 자신은 결백하다며, 아들을 죽이지 않았다고 자백을 번복했어. 심지어 재판 내내 흥분한 상태로 울고불고 심한 감정 기복을 보였어. 그런데 이런 윤 씨의 격한 행동들은 배심원제 재판에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어. 아이들 출생신고도 안했고, 방에 방치해두고, 처음엔 자기가 죽였다고 하고 재판 땐 안 죽였다고 번복하고. 배심원 눈에 이게 좋게 보일 리가 없지.

결국 윤 씨는 만장일치로 유죄 판결이 났고, 징역 20년을 선고 받았어. 윤 씨는 억울하다고 항소했지만 기각됐어. 그렇게 이 사건은 잊혀지는 듯 했어.

▲ 억울한 엄마, 왜곡된 영어 표현

그 후 2년이 지난 1989년 여름. 당시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유일한 한인 변호사였던 서승해 변호사는 우연히 "자기 아들 죽여서 감옥 간 한국여자가 계속 억울해 하고 있다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 얘기를 듣고 서 변호사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대. 같은 한국 사람인데 억울해 한다니 마음이 쓰였지. 그래서 무작정 윤 씨 면회를 갔어. 서 변호사는 윤 씨를 보는 순간,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대.

"'아들이 어떻게 죽였느냐'는 질문에 대답하면서 목이 막혀서 말도 못하더라고요. 제가 도와주지 않으면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고, 제가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도와주기로 마음을 정한 것 같아요." –서승해 변호사

서 변호사는 사건을 처음부터 되짚어 보기로 했어. 먼저 사건이 일어난 콜로니얼 호텔부터 갔어. 거기서 호텔 주인을 만나 "혹시 전에 여기 묵었던 윤 씨를 아세요?"라고 조심스럽게 물었어. 그러자 호텔 주인은 윤 씨는 절대 자기 애를 죽일 사람이 아니라고 편을 들었어. 호텔 주인은 윤 씨를 성실한 성격에 좋은 엄마라 기억하고 있었어.

처음 호텔에 왔을 때 윤 씨는 아주 궁핍했대. 여자 혼자의 몸으로 아이 둘을 돌보는데 돈도 없었어. 윤 씨는 자기가 취직을 해서 금방 갚을 테니 제발 여기서 머무르게 해달라고 호텔 주인에게 사정했대. 딱해 보인 주인은 윤 씨에게 방 한 칸을 내어주고, 자기가 운영하는 바에 취직도 시켜줬어. 윤 씨는 엄청 성실히 일을 잘했고, 일하는 시간 외에는 항상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대. 애들도 엄마를 잘 따랐고. 좋은 엄마였다는 거야.

이 호텔 주인이 아주 결정적인 이야기를 해줬어. 윤 씨가 295호에 살았는데, 호텔 주인은 윤 씨의 방 바로 밑에 살고 있었어. 사건이 벌어진 바로 그날, 위에서 뭔가 쿵 떨어지는 소리가 났대. 중요한 건, 쿵 소리가 난 시간이야. 주인은 밤 9시쯤이라 했어. 그때 윤 씨는 일하러 나가고 방에는 아이들만 있던 시각이야. 호텔 주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애들만 있는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서 변호사는 재판 기록을 다시 검토했어. 근데 윤 씨의 진술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 경찰조사 때부터 재판까지, 윤 씨 곁에는 통역관이 없었어. "제가 증명하겠다고요!"라는 말만 반복하는 윤 씨의 표현은 어딘가 엉성했어. 영어가 서툴렀던 윤 씨는 자신의 상황이나 사건이 돌아가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표현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아는 단어만 반복한 거야. 속이 타들어 가니까 더 단호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흥분 상태로 목소리를 높였어.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에 눈물도 터져 나왔고.

"전 아들을 죽이지 않았어요. 전 아들을 사랑해요. 아들이 보고 싶어요."

윤 씨는 계속 무죄를 주장하며 억울해 했어.

▲ 아메리칸 드림, 비극의 시작

윤 씨의 사연을 알게 된 우리 교민들은 "이거 제대로 조사한 거 맞아?", "동양인이라고 차별한 거 아니야?"라며 들끓기 시작했어. 하지만 담당 검사는 윤 씨가 영어를 못했다고 배심원들이 진실을 파악하지 못하거나 오해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뜻을 굽히지 않았어.

이 소식은 한국에까지 전해졌고, SBS '그것이 알고싶다' 팀이 미국으로 직접 취재를 나갔어. 당시 MC였던 배우 문성근도 취재에 동행했고, 미국 교도소에서 복역 5년째인 32세 윤 씨를 만났어.

먼저 사건 현장에서 제일 이상했던 거, 현장을 말끔히 치운 이유에 대해 물었어.

"신고를 한 다음에 방이 너무 지저분한 것 같더라고요. 그런 게 미국에서는 아동학대로 치기 때문에 우리 딸에 대해서 괜한 이유를 잡아서 미국 정부에서 데려가지 않을까 겁이 나서…"

아들이 죽었는데 딸을 뺏길까봐 집을 치웠다는 거야. 보통은 신고부터 할 텐데 말이야. 사실 윤 씨에게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어.

윤 씨의 고향은 충남 서산인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집이 많이 어려웠어. 그래서 오빠가 생계를 책임졌어. 어느날 열여섯살의 미정이는 방청소를 하던 중 오빠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들여다 봤어. 그런데 오빠의 일기에는 막냇동생과 홀어머니가 안 계셨다면 죽었을 거라는, 가슴 아픈 글이 적혀 있었어. 미정이는 오빠의 짐을 덜어 줘야겠다는 생각에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나왔어.

고작 열여섯살이 어디서 돈을 벌겠어. 그러다 우연히 미국으로 시집 가면 잘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었어. 그래서 찾아간 곳이, 미군 부대 근처의 기지촌이였어. 기지촌은 주한 미군을 상대로 하는 옷가게, 술집, 음식점 등이 모여있던 마을이야. 나라가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1976년도, 이곳의 여성들이 찾은 탈출구는 미군을 만나 결혼하고 미국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거였어.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이지.

미정이도 미군을 만나 결혼해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예쁜 딸을 한 명 낳았어. 이때가 미정이 나이 20살 때야. 근데 미국에 막상 갔더니 남편은 돌변했어. 마약을 하고 폭력을 행사했어. 미정이는 얼마 못 가 이혼했고, 그 딸은 미정이가 맡아 키웠어. 미국에 아는 사람이 없던 미정이는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결국 양육권을 빼앗겼어.

미정이는 상처 받은 자신을 위로해주는 남편을 만나 두번째 결혼을 했어. 스물넷의 나이에 아들을 낳고 2년 뒤에 딸도 낳았어. 이제 정말 불행 끝, 행복 시작인 줄 알았어. 하지만 이번에도 똑같았어. 두번째 남편도 마약에 폭행에, 심지어 아이들 앞에서도 주먹을 휘둘렀어.

미정이는 두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기로 결심했어. 근데 미국에서는 배우자 몰래 자식만 데리고 나오면 납치래. 들키면 아이들 둘 다 뺏기는 거야. 그래서 미정이는 두 아이들과 시골 마을에 있는 콜로니얼 호텔로 숨은 거였어.

사건이 있던 그 날도 아이들 밥을 먹이고 저녁 7시에 출근했대. 문은 잠그고 TV는 켜둔 채로. TV를 켰던 이유는, 혹시 누가 아이들의 울음 소리를 듣고 신고할까 봐였어. 아이들을 지키고 싶은 엄마의 마음에서. 그렇게 한참 일하고 새벽 2시에 집에 왔는데, 아들이 서랍장에 깔려 있던 거야.

▲ 드디어 드러난 진실

윤 씨가 처음에 "베이비시터 때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지? 말이 안 통하는 상황에서 본인이 살인죄로 들어온 걸 정확히 인지 못하고, 베이비시터를 두지 않고 일하러 나간 거 때문에 자기가 잡혀 들어온 걸로 생각했기 때문이야.

또 윤 씨가 체포된 결정적인 이유였던 자백. "내가 아들을 죽였다", "내 잘못이다"라고 했던 자백의 말들도 문화 차이에서 온 오해였어.

한국에서 자식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부모들이 보통 "다 내 탓이다", "내 잘못이다"라고 하잖아? 윤 씨는 아들을 잃은 슬픔과 자책의 넋두리로 "내가 죽였다"고 말한 건데, 이 말을 들은 미국 경찰은 윤 씨가 살인을 자백한 걸로 받아들인 거야. 결국 한국과 미국의 문화적 차이 때문에 생긴 오해였던 거야.

근데 이런 오해가 있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이 억울함을 풀려면, 윤 씨가 아들을 죽이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어야 해.

서승해 변호사는 사건 현장에 있었던 서랍장과 TV를 가지고 아이가 혼자 서랍장을 넘어뜨리는 게 가능한지 과학적으로 접근했어. 처음에는 법원이 증거물을 안 보여주려고 거절했는데, 서 변호사가 포기하지 않고 탄원서까지 제출해 결국 법원의 허가를 받아내 서랍장과 TV를 확보했어. 그리고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가장 권위있는 대학교의 공학 교수를 섭외하고, 죽은 아들과 체격이 같은 아이를 찾아 실험을 진행했어.

실험 결과, 아이가 서랍 안에 서서 TV를 만지다가 아이의 무게와 TV의 무게가 합쳐지면 서랍장과 함께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어. 이때 아이의 하반신이 서랍장 안쪽으로 들어가 깔리고 상반신이 서랍장에 눌리면, 기절한 상태에서 질식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어. 배와 등쪽에 길게 난 멍자국도 서랍장에 오랫동안 눌리면 생길 수 있다는 거야. 실제로 아들의 사인은 '흉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였어.

하지만 재심 신청은 쉽지 않았어. 서 변호사가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알아본 결과, 재심이 안된다면 사면 신청이라도 해보기로 했어. 사면은 특정 범죄자에 대해 죄를 면제해주거나 일부 감경해주는 제도야. 우리나라는 대통령에게만 사면권이 있는데 미국은 주지사에게도 사면권이 있대.

이 때부터 한인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해. 윤 씨의 석방을 돕기 위한 후원회도 꾸려지고, 지역신문에도 대서특필 됐어. 여성을 위한 한인교회 여금현 목사를 필두로, 여성 인권 운동의 대명사인 기지촌 여성인권 운동가 문혜림 여사와 그의 딸 문영미 씨까지 모두 윤 씨의 구명운동을 펼쳤어.

그러자 세계 곳곳에서 탄원서가 주지사 앞으로 소나기처럼 빗발 쳤어. 1300여명이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보냈어. 이건 한국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영어가 미숙한 누구든지 겪을 수 있는 일이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나도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거야.

사면 신청 결과는? 1992년 12월 30일, 윤 씨의 석방이 결정됐어.

그런데 한가지 아쉬운 건, 이게 사면은 아니고 가석방이었어. 사면은 남은 형을 아예 없애주는 거지만, 가석방은 석방시켜준 상태에서 형을 유지하는 거라 완전히 자유는 아닌 거야. 그래도 윤 씨는 그렇게 감옥 밖으로 나왔어.

▲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이방인이었던 여인

윤 씨는 여 목사의 도움으로 뉴욕으로 가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어. 옷가게에서 일도 하고 교회도 열심히 다니며 살았어. 그런데 사건 이후 생이별하 듯 헤어진 딸에 대한 그리움이 극에 달한 윤 씨는 눈물을 펑펑 쏟았어. 이를 딱하게 여긴 여 목사의 도움으로 윤 씨가 딸을 만났어.

그런데 10년만에 만난 딸과 엄마는 엄청 서먹서먹 했어. 불과 1살 때 헤어졌으니, 딸한테 엄마는 그야말로 초면인 거야. 윤 씨는 딸과 제대로 된 대화조차 못 나누고, 준비한 선물만 주고 헤어졌어.

이후 윤 씨는 언젠가 다시 만날 딸과 의사소통이 잘 되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엄마가 되기 위해 영어 공부를 시작했어. 언어 차이 때문에 갔던 교도소인데, 이제 그 언어 때문에 딸이랑 소통도 안돼. 어렵게 밖으로 나왔지만 현실은 여전히 감옥 같았어.

"가슴 아픈 것은, 내가 왜 미국 사람이 아닌가. 내가 왜 영어를 잘 모르는가. 나는 왜 세상에서 뒤떨어져 있나. 조그만 감옥에서 큰 감옥 속으로 나온 것 같아요." –윤미정 씨

이번 방송을 준비하며 '꼬꼬무' 제작진이 윤 씨를 찾았어. 22년만에 찾은 윤 씨는 뜻밖의 모습이었어.

윤 씨는 2021년 12월 21일, 만 61세의 나이로 한국에서 세상을 떠났어. 그녀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알고보니 윤 씨는 2006년에 미국에서 한국으로 추방됐어. 미국 생활하며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대. 당시 윤 씨를 직접 만났던 사람이 있어. 그녀를 주인공으로 다큐를 준비하던 이호섭 감독이야.

"제가 윤미정 씨를 제대로 한 번 찍어보자 생각한 게 2006년도부터인데 (쉼터에) '윤미정 씨 잘 계시냐' 안부를 물었더니, 경범죄로 감옥에 있다고 하더라고요. 윤미정 씨가 멀쩡하진 않으셨어요. 무지개 집(쉼터)도 나가서 노숙자 생활도 좀 하시고... 살면서 가장 힘든 고통이, 자식을 잃은 부모 아니겠어요? 어느 기간은 딸과 함께 살기 위한 동력이 있었겠죠. 제 느낌에 미정 씨는 아들이 죽을 때 같이 돌아가신 게 아닌가." –이호섭 감독

아들도 잃고, 삶의 유일한 원동력이었던 딸과의 관계도 소원했어. 작은 희망은 언어의 장벽에 부딪쳐 또 깨졌어. 윤 씨는 미국에서 노숙 생활을 하다가 경범죄로 잡혀서 추방이 결정됐대. 윤 씨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던 2006년 10월 21일. 이호섭 감독이 윤 씨의 마지막 모습을 포착했어.

뭔가 다 내려놓고 체념한 표정. 반편생 살아온 미국을 떠나는 날, 그녀에게 미국은 어떤 곳이었을까.

한국에 도착해서 윤 씨가 가장 하고 싶었던 건 고향에 가는 거였대. 근데 현실의 한국은 너무 달라졌어. 보고싶었던 가족과도 함께 할 수 없었어. 결국 한국에서도 쉼터, 길거리를 오가며 계속 지내다가 작년 겨울, 간암으로 홀로 세상을 떠난 거야.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장례식이었어.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이방인이었던 윤 씨. 그녀의 인생은 다 겨울이었을 거 같아.

"미국에 이민올 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왔겠나. 희망에 차서 와서, 하나씩 하나씩 기대가 박살되는 걸 겪어나갈 때. 왜 윤미정 씨가 그런 비극을 겪어야 됐을까." –이호섭 감독

"윤미정 씨의 잘못이라면, 가난한 집의 딸로 태어났다는 거, 그게 유일한 죄가 아닐까 싶어요. 언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문영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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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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