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을 수 있었다""강남역 때와 똑같아"..신당역 찾은 시민들 분노
"피해자가 스토킹 피해를 호소하는 상황에서 경찰도 직장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것에 분노가 치밉니다. 강남역 살인사건 추모 공간에도 갔었는데 그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는 게..."
신당역 근처에 거주하는 공무원 이예슬씨(34)는 국화꽃 한 송이를 들고 신당역 10번 출구를 찾았다.
16일 오전 10시쯤 서울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자 화장실 앞과 10번 출구 앞에는 숨진 A씨를 추모하는 공간이 마련됐다. 추모 벽면에는 A씨를 추모하는 내용의 쪽지가 수십장 붙어있었다.
'살아서 퇴근하고 싶다!' '후배님 지켜주지 못해 죄송합니다' '여성이 안전한 세상. 더 이상의 희생은 없어야 한다' 등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옆에 설치된 책상에는 국화꽃과 안개꽃 다발 60여개도 놓여 있었다.
준비한 조화를 내려놓은 이씨는 "충분히 막을 수 있는 범죄였다고 생각한다. 저도 공무원인데 내부망에서 근무상황을 확인하지 못하게 설정할 수 있다"며 "피해자가 스토킹을 호소하는 상황에서 서울교통공사에서 피해자의 근무 상황을 확인하지 못하게 해 적극적인 신변 보호를 해야 했다"고 했다.
10번 출구 앞 추모 공간을 찾은 주모씨(30)는 한참 다른 이들이 붙인 추모 쪽지들을 바라보며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주씨는 "같은 여성으로서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는 것이 가장 두렵다"며 "변하지 않는 사회를 생각하면 너무 답답하고 도와줄 수 없었다는 생각에 눈물도 난다"고 했다. 주씨는 "할 말은 많은데 먹먹해서 많이 적질 못하겠다"며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쪽지를 짧게 써 붙이고 떠났다.
시민들은 스토킹 살인 범죄를 막지 못한 수사기관과 사법부에 분노를 표출했다. 여자 화장실 앞 추모 벽면에는 '이미 범죄 전과가 있었고 스토킹으로 재판을 받던 중이었는데, 진작에 사회격리 시켰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던 비극입니다' '스토킹을 살인으로 번지게 놔둔 사법부'라는 메시지가 적혀있었다.
대학원생 김모씨(27)는 "화장실 입구에 '여성이 행복한 서울 여행(女幸) 화장실'이라고 붙어 있는데 여성이 죽어 나간 화장실이 과연 행복한 화장실이냐"라며 "가해자가 감옥에 갈 때까지는 과하다 싶은 정도로 피해자를 가까이에서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프리랜서 김진아씨(39) 추모 공간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짧은 묵념을 마친 김씨는 "피해자분이 평안한 날이 하루도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너무 마음이 아프고, 그분은 끝까지 자신이 맡은 일을 열심히 하려고 했다는 점도 아프다"며 "사소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작은 목소리라도 잘 들어서 안전하게 보호했으면 한다"고 했다.
지나가던 시민들도 쪽지를 읽거나 사진을 찍었다. 생각에 잠겨 탄식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신당역 근처에서 직장을 다니는 유혜란씨(33)는 "이전에도 스토킹 신고를 했던 피해자가 살해당할 때까지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했던 게 안타깝다"며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고 해서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고 했다.
신당역 인근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양모씨(57)는 "누가 또 앙심을 품으면 아무도 막지 못해 누군가는 죽어야 하는 무서운 세상"이라며 "죽은 사람이 스토킹을 당하고 그 사람을 같은 회사에서 만났어야 했는데 얼마나 불안했겠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가해 남성 전모씨(31)는 지난 14일 저녁 9시쯤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자 화장실에서 역무원 A씨를 흉기로 살해해 현장에서 체포됐다.
전씨는 A씨로부터 고소를 당해 재판 중이었다. A씨는 전씨가 자신을 불법 촬영하고, 그 촬영물로 협박했다며 그를 지난해 10월 고소했다. 경찰은 전씨를 상대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하지만 법원은 "주거가 일정하고 증거인멸과 도주 우려가 없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전씨는 풀려난 뒤 A씨에게 여러 차례 합의를 요구했다고 전해졌다. A씨는 전씨를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로 지난 1월 추가 고소했다. 검찰은 전씨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촬영물 등 이용 강요), 스토킹처벌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했다. 전씨는 이날 오전 10시30분 1심 선고를 받기로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전날 살인 사건을 일으켜 선고는 오는 29일로 미뤄졌다.
경찰은 전씨가 계획범죄를 저질렀다고 보고 있다. 범행 당시 전씨는 위생모를 쓰고 있었다. 현장에 체모 등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씨는 경찰 조사에서 "재판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내용의 진술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수사에 따라 혐의를 보복살인으로 변경할 방침이다.
서울중앙지법은 이날 오후 3시 전씨에 대한 영장실질심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심사는 김세용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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