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콘텐츠 역사 새로 쓴 《오징어 게임》의 경쟁력
IP 모두 넘기는 계약 문제점이 K콘텐츠의 '뜨거운 감자'로
(시사저널=정덕현 문화 평론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이 비영어권 최초로 에미상을 수상했다. BTS의 빌보드 석권,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수상에 이은 《오징어 게임》의 에미상 수상. 도대체 이건 어떻게 가능했고 그 의미는 무엇이며 남은 숙제는 뭘까.
에미상마저 정복한 《오징어 게임》
제74회 프라임타임 에미상에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이 총 6개 부문을 석권했다. 사실 《오징어 게임》의 에미상 수상에 대한 기대감은 이 작품이 최우수 드라마 시리즈 부문을 비롯해 13개 부문 14개 후보에 올랐을 때부터 한껏 부풀었다. 하지만 후보에 오르는 것으로 상을 받을 거라는 예상은 조심스러웠다. 다른 상도 아니고 에미상이 아닌가. 'TV 아카데미'라고도 불리는 에미상은 특히 비영어권에 문을 열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9월4일 열린 크리에이티브 아츠 에미 시상식에서 여우게스트상(이유미), 싱글 에피소드 부문 특수시각효과상(정재훈 외), 스턴트 퍼포먼스상(임태훈 외), 내러티브 컨템포러리 프로그램 부문 프로덕션 디자인상(채경선 외) 등 4개 부문을 수상하면서 본상이라고 할 수 있는 프라임타임 에미상에서도 수상할 수 있을 거라는 낙관적인 예상들이 쏟아졌다. 받긴 받을 것 같은데, 어느 부문에서 받을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조연상 정도를 받는다면 그건 지난해 글로벌 열풍을 일으킨 《오징어 게임》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는 정도의 의미를 가질 것이다. 반면에 주연상이나 작품상, 감독상 등을 받는다면 이 작품에 대한 인정은 물론이고 에미상도 이제 비영어권에 본격적으로 문호를 열겠다는 신호의 의미까지 갖게 될 터였다. 결국 에미상은 후자를 선택했다. 《오징어 게임》에 감독상(황동혁 감독)과 남우주연상(이정재)을 준 것이다.
《오징어 게임》의 에미상 수상이 갖는 가장 큰 가치와 의미는 K콘텐츠가 가장 넘기 어려운 장벽을 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BTS가 빌보드 차트에서 연달아 1위를 차지하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석권한 일 또한 상상 이상의 성취라고 할 수 있지만, 《오징어 게임》은 TV를 통해 집에서 시청하기 마련인 시리즈물이라는 점에서 진입장벽이 높다. 넷플릭스가 봉준호 감독의 《옥자》(2017)를 제작하고, 본격적으로 《킹덤》(2019) 같은 작품을 내놓던 시점에 이르러서야 우리네 시청자들도 해외 드라마들을 집에서 일상적으로 접하게 됐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라. 사실 지금도 시리즈물은 국가 간 장벽이 영화보다 높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TV 시리즈인 《오징어 게임》의 에미상 수상은 그 의미가 각별해진다. 이제 K콘텐츠가 전 세계 대중들에게 일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게 된 상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K콘텐츠는 하나의 브랜드처럼 외국인들에게도 훨씬 친숙한 존재가 됐고, 빌보드와 아카데미를 넘어 에미상이 드디어 이를 공식적으로 인증해 줬다.
또한 이번 에미상 수상에서 황동혁 감독과 이정재가 상을 거머쥐었다는 사실 역시 남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마치 K콘텐츠의 경쟁력이 다름 아닌 감독과 작가, 배우 같은 인력에서 비롯된 바 크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드라마 업계에는 최근 몇 년간 지속적으로 영화 인력이 유입됐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드라마에 도전하고, 영화감독이 드라마 시리즈를 연출했으며, 영화 스태프가 드라마 스태프로 들어와 그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물론 드라마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작가와 연출들도 자연스럽게 더 높은 퀄리티의 작품들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드라마 업계와 영화업계 인력의 시너지가 《오징어 게임》 같은 작품이 탄생할 수 있는 배경이 됐다. 《남한산성》 같은 영화의 각본과 연출을 모두 맡았던 황동혁 감독이 그렇고, 《부산행》 같은 영화는 물론이고 《방법》 같은 드라마를 오가며 작가와 감독을 넘나드는 연상호 감독이 그렇다. 또 《지금 우리 학교는》을 연출한 이제규 감독 역시 《완벽한 타인》 《역린》 같은 영화뿐 아니라 《베토벤 바이러스》 《더킹 투하츠》 같은 드라마로도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다양한 경험을 가진 우수 인력들이 사실상 K콘텐츠의 중요한 경쟁력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이 거둔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에 담긴 의미와 가치가 남다르게 보이는 이유다.
넷플릭스와의 협업 산물
《오징어 게임》의 이번 성과가 넷플릭스라는 글로벌 플랫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협업의 산물이라는 점 또한 중요하다. 《오징어 게임》은 한국 제작자와 스태프, 배우들이 만든 작품이지만, 넷플릭스가 제작비를 투자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을 전 세계에서 볼 수 있게 해준 작품이다. 작품 공개 후 28일 동안 누적 시청량 기준 16억5045만 시간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넷플릭스가 있어서였다.
넷플릭스의 힘이 우리의 콘텐츠 소비에 얼마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가는 이번 에미상을 받은 《오징어 게임》은 물론이고, 후보에 올라온 다른 작품들을 통해서도 실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번에 에미상에서 《오징어 게임》과 경쟁해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석세션》을 아는 한국 시청자는 상대적으로 적다. 우리에게는 아직까지 낯선 OTT인 HBO 작품이기 때문이다. 물론 웨이브에서 HBO와 제휴해 콘텐츠가 서비스되곤 있지만 웨이브라는 OTT의 성격 자체가 국내 지상파, 종편 콘텐츠 플랫폼에 가까워 노출 빈도는 낮은 편이다.
대신 이번 에미상에 후보로 올라온 작품 중 《오자크》나 《베터 콜 사울》은 익숙하다. 한국에 자리 잡은 넷플릭스에서 서비스된 작품들이어서다. 우리가 넷플릭스를 통해 서비스되는 콘텐츠들을 더욱 친숙하게 느끼는 것처럼, 해외 소비자들도 한국의 《오징어 게임》을 더 친숙하게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친숙함에서 시작해 신드롬으로까지 이어진 결과에 에미상 역시 상을 줄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그건 《오징어 게임》의 놀라운 성과 때문이 아니다. 넷플릭스 같은 OTT를 통해 전 세계인의 콘텐츠 소비가 일상화돼 있고, 이를 통해 영어권만이 아닌 비영어권 콘텐츠들도 열렬히 소비되고 있다는 걸 이 신드롬이 보여줬기 때문이다.
즉 시상식의 결과는 작품이 거둔 성취에 대한 평가의 성격을 갖지만, 동시에 시장과 연결된 산업적인 의미 또한 갖기 마련이다. 이제 OTT 체제로 바뀌어가고 있는 콘텐츠 소비시장은 인터넷이라는 특징이 그러하듯 '글로벌하게' 확장되고 있고, 이 시장을 잡기 위해서는 미국이라 하더라도 비영어권까지 포괄하는 시장 정책이 요구된다. 그런데 인터넷의 특징은 '일방향'이 아닌 '쌍방향'이다. 비영어권 콘텐츠들이 로컬의 색깔을 갖고 영어권 콘텐츠들과 나란히 서게 될 때 비영어권에서도 소비가 일어날 수 있다. 최근 이른바 콘텐츠 업계에 불고 있는 '다국적 협업'은 이런 산업적인 변화 안에서 생겨나고 있는 현상이다. 넷플릭스가 한국 콘텐츠에 지금껏 1조원이 넘는 돈을 투자하고, 애플TV가 《파친코》에 1000억원을 투자하는 일들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유다.
결국 이 글로벌 콘텐츠 시장에서는 여러 국적을 가진 제작사와 제작사가, 또 제작사와 플랫폼이 얼마나 시너지를 내는 협업을 해내는가가 성패를 가르는 관건이 된다. 아카데미나 에미상 같은 권위 있는 시상식이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면 과거 봉준호 감독이 했던 말처럼 '로컬 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오징어 게임》의 에미상 수상에는 이런 시장 변화가 깔려 있다는 이야기다.
제2의 《오징어 게임》을 위해
"저는 《오징어 게임》이 에미상을 수상하는 마지막 비영어권 시리즈가 아니길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받는 마지막 에미상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시즌2로 돌아오겠습니다." 황동혁 감독은 감독상 수상 소감에 굳이 뼈 있는(?) 멘트를 집어넣었다. 이번 수상이 단지 에미상이 보여주는 일회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앞으로도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비영어권 시리즈들에도 문호가 열리는 그런 포문이 되기를 기대한다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오징어 게임》 시즌2에 대한 기대감을 남기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사실 영어권 시리즈들은 여전히 《오징어 게임》 같은 어마어마한 성취를 내지 않아도 에미상 후보에 오르고 상을 받아가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 《오징어 게임》의 수상이 비영어권에 그만한 성취를 내야 에미상을 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로 남는 걸 황동혁 감독은 바라지 않았을 게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도 풀어야 할 숙제들이 만만찮다.
그 첫 번째는 넷플릭스의 투자를 받아 제작한 오리지널 시리즈들이 '제작비+알파(+α)'를 받는 대신 IP(지식재산권)를 모두 넘기는 데 따른 문제다. 사실 《오징어 게임》의 경우 어마어마한 경제적 이익을 넷플릭스가 얻었지만 제작자는 계약에 의해 보너스를 받았을 뿐 그 이상의 인센티브를 가져갈 수 없었다. IP를 모두 넘기는 이러한 계약은 인센티브는 물론이고 IP를 활용한 리메이크나 타 장르 콘텐츠 개발 같은 기회를 모두 잃게 된다. 이 문제는 최근 실제로 작가나 감독들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근본적으로 다국적 협업에 균열이 생길 수 있다는 점에서 달라진 K콘텐츠의 위상에 맞는 합리적인 계약은 제2의 《오징어 게임》을 위한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두 번째는 K콘텐츠도, 또 넷플릭스도 《오징어 게임》을 탄생시켰던 그 초심의 도전과 실험을 변함없이 해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 넷플릭스 오리지널 K콘텐츠들이 초창기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고, 그 원인으로 '안전한 선택'을 한다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같은 리메이크작을 한다거나, 《블랙의 신부》 같은 막장 드라마의 넷플릭스 버전을 내놓는 것이 그렇다. 또 《브레이킹 배드》나 《오자크》의 한국판 같은 《모범가족》이나 《분노의 질주》와 《베이비 드라이브》의 한국판 같다는 평가를 받은 《서울대작전》도 마찬가지다. 이들 작품에 빠져 있는 도전과 실험은 그간 K콘텐츠의 중요한 차별점이었다는 점에서 초심을 되찾는 일은 그만큼 절실하다고 볼 수 있다. 적당한 리메이크나 해외 성공작의 한국 버전을 내놓는 일은 넷플릭스에는 당장의 안전한 수익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K콘텐츠와 넷플릭스 모두 제 살 깎는 결과를 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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