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하고 낯선 실험극.."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과정"

2022. 9. 16.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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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벨기에 리에주극장 공동제작
종합예술 실험극 '스트레인지 뷰티'
"서로 다른 예술가들의 아름다움 찾는 과정"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공연 중인 ‘스트레인지 뷰티(Strange Beauty)’는 한국, 유럽, 아프리카, 남미 등 다양한 대륙 출신의 창작자 7명이 참여, ‘아름다움’을 주제로 공동 작업을 진행한 작품이다. 사진은 배요섭 연출가(오른쪽)와 마리아 클라라 빌라 로보스(왼쪽), 에메 음파네(가운데). 임세준 기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 장면1. 나뭇가지를 입에 문 여섯 명의 예술가들은 말을 할 수도, 그렇다고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무문관 제5칙 향엄상수’ 공안. “향엄 화상이 말한다. ‘가령 어떤 사람이 나무에 올랐는데, 입으로는 나뭇가지를 물고 있지만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붙잡지도 않고 발로도 나무를 밟지 않고 있다고 하자. 나무 아래에는 달마가 서쪽에서부터 온 의도를 묻는 사람이 있다. 대답하지 않는다면 그가 질문한 것을 외면하는 것이고, 만일 대답한다면 나무에서 떨어져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이 질문(공안)에 대한 예술가들의 퍼포먼스는 생생하고 실감났다. 외면할 수도, 그렇다고 목숨을 걸 수도 없다. 목구멍에 걸린 소리가 신음만을 내뱉고, 소통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예술가들은 괴로운듯 뒤틀린다.

# 장면2. 서로 다른 언어가 충돌한다. 한국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벵갈어가 팔딱팔딱 살아 존재한다. 배요섭 연출가는 “예술가들에게 각자 제일 마음에 드는 공안을 선택하게 하고 에세이를 쓰게 했다”고 했다. 예술가들의 말은 그 에세이의 요약이다. 각자의 언어가 터져나올 때 이들은 대화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싸우는 것 같기도 하다. 공감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무문관 제19칙 평상시도’ 공안. “하고자 하지 않아도 스스로 드러나는 본 모습”, 유일한 개체(싱귤래러티)로서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이 이곳에 있다. “언어로 할 수 없는 것들, 언어 너머에서만 가능한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도리어 언어를 가져왔다.

‘낯선 실험’이 이어진다. 최근 국립극단에서 만난 마리아 클라라 빌라 로보스는 “이 작품은 공안들만큼이나 수수께끼 같고, 제목처럼 스트레인지(Strange)하다”고 말했다.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공연 중인 ‘스트레인지 뷰티(Strange Beauty)’는 한국, 유럽, 아프리카, 남미 등 다양한 대륙 출신의 창작자 7명이 참여, ‘아름다움’을 주제로 공동 작업을 진행한 작품이다. 배요섭 연출가를 비롯해 배우 겸 드라마투르그 황혜란과 콩고·벨기에에서 활동하는 비주얼 아티스트 에메 음파네, 벨기에 출신 배우 클레망 티리옹과 사운드 아티스트 파올라 피시오타노, 브라질 출신 안무가 마리아 클라라 빌라 로보스, 한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최용석이 공동 작가이자 퍼포머로 함께 했다. 지난 8월 벨기에 도시 스파에서 열린 공연축제에서 먼저 선보였고, 9월 한국 관객과 만난 뒤 오는 12월 벨기에 리에주 극장에서 다시 현지 관객과 소통한다.

배요섭 연출가(오른쪽)는 “‘스트레인지 뷰티’는 아름다움이라는 결과를 보여주는 작품이 아니라, 그것을 찾기 위해 던진 질문들이 육화돼 나오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임세준 기자

작품엔 제목만큼 ‘기이한 장면’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각자가 정의하는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스트레인지 뷰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전형적인 미(美)와 기존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아름다움을 찾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에요.” (마리아 클라라 빌라 로보스)

무대는 장르에서부터 ‘경계’를 허물었다. 연극, 무용, 비주얼 아트, 음악 등 어느 한 장르라고 규정할 수 없다. 도리어, 이 모든 것을 망라한 실험극이자 종합예술이 ‘스트레인지 뷰티’다. 에메 음파네는 “경계 없이 여러 분야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작업한 것이 소중한 경험이 되고 있다”며 “다양한 문화권, 서로 다른 배경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작업하면서 경계가 허물어지고, 각자의 경험을 가져와 하나의 공연으로 창작을 하는 것이 매순간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배요섭 연출가의 역할도 기존의 작품과는 조금 달랐다. ‘판 디자인·연출’ 맡은 배요섭은 “기존의 연출가의 역할에서 벗어나 예술가들에게 콘셉트를 제안하고 이들이 자신의 생각과 경험, 정신세계를 펼치고 놀 수 있는 ‘판’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스트레인지 뷰티’는 아름다움이라는 결과를 보여주는 작품이 아니라, 그것을 찾기 위해 던진 질문들이 육화돼 나오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에요. 아름다움을 좇다 보니, 그것은 손에 잡히는 대상이 아니라, 경험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아름다움의 경험이 일어날 때 내가 어떤 상태에 있었고, 내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발견하는 것, 그것을 이야기할 때 아름다움의 개념이 나온다고 생각했어요.” (배요섭)

마리아 클라라 빌라 로보스는 “이 작품은 공안들만큼이나 수수께끼 같고, 제목처럼 스트레인지(Strange)하다”고 말했다. 사진은 배요섭 연출가(오른쪽)와 마리아 클라라 빌라 로보스(왼쪽), 에메 음파네(가운데). 임세준 기자

이 과정에 이르기 위해 배 연출가는 참여 예술가들과 세 단계의 ‘판’을 만들어줬다.

작품의 시작은 2020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그 해 여름 예술가들은 전라도 해남의 미황사와 벨기에에 있는 티베트 템플에서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코로나19로 공연이 1년 미뤄지며 생긴 ‘시간’ 역시 각자의 공간에서 명상을 이어갔다. 배요섭 연출가는 “내가 이 우주 안에서 어떻게 있고 어떻게 관계 맺는지 알아가는 과정이 명상의 체험이었다”며 “그 안에서 하나의 존재와 다른 존재의 공명이 일어나는 것, 그게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아름다움의 경험이 일어나는 과정에서의 나를 보려면,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필요했어요. 그러다 보니 명상을 하게 됐고, 그 과정에서 ‘무경계’와 ‘도덕경’의 도움을 받았어요.” (배요섭)

6명의 예술가들은 ‘무경계’와 ‘도덕경’을 읽으며 얻은 생각을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 마리아 클라라 빌라 로보스는 “‘무경계는 동양과 서양의 사상을 함께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었다”며 “이 책을 읽으면서 작품에 대해서도 조금 더 이해하고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 다음 단계는 무문관에서 선택한 12개의 공안(불교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깨우침을 얻도록 인도하기 위해 제시하는 역설적 물음)과 그것에 대한 코멘터리를 읽고 저마다의 답을 찾아 ‘소울 퍼포먼스’를 만드는 것이었다.

마리아 클라라 빌라 로보스는 “서양인은 이성에 입각해 보는 데카르트식 관점에 익숙한데, 공안은 그것과 반대되는 방식이라 처음엔 쉽지 않았다”며 “함께 작업하며 영감을 얻고 그 작업에 영향을 받으며 이해해나가는 과정을 거쳤다”고 말했다. 에메는 “하루종일 공안을 생각하다 보니 어느 순간 모든 것이 경계없이 다가와 조금 더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배요섭 연출가(오른쪽)와 마리아 클라라 빌라 로보스(왼쪽), 에메 음파네(가운데). 임세준 기자

2022년 7월 공안들을 주제로 고민하고, 각자가 느낀 점은 저마다의 퍼포먼스로 다듬어졌다. ‘스트레인지 뷰티’는 예술가들이 공안을 통해 얻은 영감이 발현된 퍼포먼스가 독자적인 다수의 에피소드를 만들고, 그것이 유기적으로 이어진 작품이다.

배 연출가는 “참여 예술가들의 제안들이 하나의 독립된 공연처럼 느껴졌다”며 “온전히 제안된 방향대로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돼, 각각이 침해되지 않는 선에서 살아있도록 연결했다”고 말했다.

공안을 통해 나온 퍼포먼스를 연결하는 구체적인 매개가 바로 무대 위에 설치된 대형 구조물이다. 이 구조물은 “예술가들의 정신적, 물리적 움직임들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배 연출은 “이 공간에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 확장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세 번째 판의 단계였다.

‘스트레인지 뷰티’ 작업은 참여한 창작자들에게도 의미있는 시간이 되고 있다. 에메 음파네는 “이 과정이 비주얼 아티스트로서 내가 해온 작업과도 연결돼 굉장히 많은 영감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인류의 연대와 공동체 의식에 호소”하고, “희망, 용기, 공감, 인내를 이야기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음파네는 “이전 작업과 공안을 통해 하는 작업이 하나로 지속돼 연결되고 있다”며 “이 작업이 눈에 띄는 동시에 눈에 띄지 않는 섬세한 대형 천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느낌”이라고 했다. 마리아 클라라 빌라 로보스는 “이 작품은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움보다는 낯섦과 기묘함이 두드러지는 공연”이라며 “주제를 넘어 작업 방식에서도 창작자들은 각자 친숙하지 않은 도구나 요소를 사용해 퍼포먼스로 만들며 하나의 낯섦에 다가섰다. 기묘한 아름다움이었다”고 돌아봤다.

몇 개의 정해진 약속을 제외하면, 창작자들이 만들어가는 무대는 매번 달라진다. 배 연출은 “지금 이 무대가 완성은 아니”라고 했다. 공연은 ‘즉흥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매순간 무대에서 보여지는 이들의 ‘몸의 언어’는 거짓도 꾸밈도 없다.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답을 얻기 위해, 무수히 많은 질문을 던지는 과정은 ‘도덕경’이 말하는 ‘무위(無爲)’를 발견하는 과정이자, 가장 순수한 내면, ‘본래의 나’를 만나는 과정처럼 보인다. 비로소 ‘내가 되는 과정’이다.

“작품에서 풀어낸 공안 중 다양한 언어로 이야기하는 제19칙 평상시도는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가 말한 ‘싱귤래러티’와 일치했어요. 개별성, 독자성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것은 ‘네 안에 너의 부처가 있다’는 말이기도 해요. ‘너 자신의 본래 면목(본성)을 찾으면 그것이 너의 부처’라는 것이 들뢰즈와도 일치해요. 각자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 시도해보며 관객도 각자의 방식대로 경험을 가져가길 바랍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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