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등고래 30년 찍다보니.. 우영우처럼 내 눈앞에도 고래 떠다녀"
■ M 인터뷰 - 드라마 ‘우영우’ 속 고래사진작가 장남원
신문사 사진기자 20년간 근무
1992년 日서 처음본 혹등고래
자꾸 눈에 아른거려 사직서 내
섬나라 통가서 고래 찍기 시작
성체 몸길이 11~16m 달하지만
촬영때 한번도 위험한 순간없어
부딪힐듯하면 살짝 피해주기도
지느러미 뻗은사진 가장 좋아해
‘내 손을 잡고 올라와’ 말하는 듯
내년 더 큰 향유고래 찍으러 가
“우영우 변호사처럼 저도 고래를 보며 마음의 안식을 얻습니다.”
국내 유일의 고래전문 사진가 장남원(72) 작가는 “드라마 속 우영우가 어려운 상황에 닥쳤을 때 고래를 떠올리며 돌파구를 찾듯, 내가 지치고 힘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고래가 나를 일으켜줬다”고 말했다. 장 작가는 이어 “내가 찍은 고래사진 중 가슴지느러미를 아래로 뻗은 사진을 제일 좋아한다”며 “고래가 ‘내 손을 잡고 올라와’라고 말하며 사람과 교감하는 느낌이 든다”고 소개했다. 30여 년간 고래사진을 찍어온 장 작가는 9번의 고래사진전을 열었고, 고래사진집 ‘움직이는 섬’을 출간했다.
지난달 종영한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지닌 주인공 우영우(박은빈)가 대형 로펌에 들어가 좌충우돌하며 천재적인 두뇌로 다양한 사건을 해결해가는 내용을 담았다. 방영 당시 최고 시청률 17.5%를 기록한 이 드라마는 넷플릭스 비영어권 드라마 부문에서 7주 연속 시청시간 1위를 차지했다.
우영우가 난처한 상황에 처하거나 난관에 부딪힐 때면 바람과 함께 고래가 나타나고, 우영우는 신박한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드라마 4회에서는 우영우가 로펌 회의실에 걸린 대형 혹등고래 사진을 보고 눈물을 글썽이는 장면이 나왔다. 이 사진이 바로 장 작가 작품이다.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며 장 작가의 고래사진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장 작가는 “우영우가 나를 띄워준 건지, 내가 우영우를 뜨게 한 건지 모르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5월 5일부터 잠실 롯데월드타워에서 고래사진전을 했는데 6월 초쯤 드라마 제작진이 찾아왔어요. 부산 고래전문서점에서 한국에 고래사진가가 있다는 얘길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감독이 사진을 골랐고, 롯데월드타워 내 사무실을 빌려서 촬영했어요. 가로 6m, 세로 3m 크기로, 프린트 비용이 800만 원 든 이 사진은 롯데월드몰 지하 1층 아쿠아리움에 전시돼 있어요. 제가 찍은 고래사진이 TV 화면 가득 나오는 장면을 보고 제 눈에도 눈물이 고였어요. 감동이 밀려왔어요.”
이 드라마에서 고래는 주인공 캐릭터를 구축해주는 역할을 한다. 장 작가에게도 고래는 그런 존재다.
“우영우는 고래에게 기대며 고래를 통해 평온함을 느끼죠. 드라마에서 우영우 옆으로 커다란 고래가 헤엄쳐가는 장면을 컴퓨터그래픽으로 붙였는데 제 눈앞에도 고래가 떠다녀요. 7년 전에 큰 수술을 여러 번 받았어요. 멕시코 수중동굴에서 패혈증에 걸려 심장·간·대장이 모두 망가졌어요. 두 달 동안 항생제 490병을 맞았어요. ‘이러다 죽겠구나’ 싶었죠. 병원에 오래 있으니 우울증까지 왔고요. 서울아산병원 창가에 서서 한강을 내려다보며 고래가 헤엄쳐가는 상상을 했어요. 그러면서 삶의 희망을 찾았고요. 퇴원하자마자 고래 만나러 통가로 달려갔어요.”
중앙일보 사진기자 출신인 장 작가는 일본 오키나와(沖繩) 남쪽 자마미섬 인근 바다에서 고래를 처음 만났고, 뉴질랜드 옆 작은 섬나라 통가에서 처음 고래 촬영을 했다. 혹등고래 성체는 몸길이가 11∼16m이며 몸무게는 30t에 달한다.
“남들과 다른 사진을 찍고 싶어서 1992년에 오키나와에 갔다가 일본인 배 주인이 ‘고래 보러 갈래?’라고 권해서 혹등고래 새끼를 처음 봤어요. 이 아이의 선한 눈망울이 제 마음에 자리 잡고 떠나질 않아서 1997년 중앙일보를 사직한 뒤 통가로 가서 고래사진을 찍기 시작했어요. 처음 눈앞에 나타난 건물 크기만 한 혹등고래를 봤을 땐 무서웠어요. 하지만 인간과 가장 친한 고래라는 걸 알게 된 후 친근감이 들었죠. 헤엄치다가 사람과 부딪칠 것 같으면 긴 지느러미를 접어 피해줘요. 30년 넘게 혹등고래를 촬영하며 단 한 번도 위험한 순간이 없었어요.”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장 작가는 1977년 중앙일보 사진부에 입사해 우연한 기회에 수중사진을 접했고, 종군취재도 여러 차례 경험했다.
“사진기자 일이 처음에는 힘들었어요. 물을 좋아해 해군에 자원했는데 수중사진을 보고 ‘이게 내 길이구나’ 생각했죠. 그때부터 스쿠버다이빙을 배우고, 외국 서적을 보며 수중사진을 공부했어요. 나같이 수중사진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론서도 냈고요. 회사에서 삼성물산을 통해 수중촬영장비를 구해줘서 수중사진을 전담했어요. 그러다가 다들 가기 싫어하는 전쟁터에 가게 됐어요. 소말리아내전과 르완다내전, 걸프전 등을 취재하며 처참한 전장을 카메라에 담다가 지쳤어요. 아이들이 학살당하는 장면을 더 이상 못 찍겠더라고요. ‘번아웃’이 왔죠. 일도 하기 싫어져서 회사를 나와 회사 근처에 제 별명을 내건 고깃집 ‘고릴라’를 열었어요.”
일흔을 넘긴 장 작가는 새로운 도전을 준비 중이다.
“평생 혹등고래만 찍었는데 이제 소설 ‘모비딕’의 주인공인 향유고래를 만나려고 해요. 향유고래는 혹등고래보다 더 커요. 수컷 성체는 몸길이가 18m까지 자라거든요. 향유고래를 촬영하려면 도미니카공화국에 가야 해요. 내년 5월에 가려고 주한도미니카공화국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했어요. 향유고래는 5월에 새끼를 낳고 수심 50m 아래로 내려가거든요. 벌써 설레요.”
체구가 커서 선배들이 ‘고릴라’라는 별명을 지어줬다는 장 작가의 서글서글한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가 푸근한 고래로 보였다. 장 작가에게 “음식을 푸짐하게 내주는 ‘고래’라는 식당도 차리라”고 권하자 손사래를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김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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