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고 상상하고.. '살아 있는 영어'의 경이로움
■영어의 마음을 읽는 법
김성우 지음│생각의힘
단어·문법만 달달 외우는
시험에 갇힌 영어 벗어나
제대로된 학습 비법 전수
인지언어학 이론에 바탕
타자의 생각·감정에 접근
사회적 맥락속 공부 강조
영어는 암기 과목이었다. 공부가 재밌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단어와 숙어를 달달 외우고, 품사와 문법을 따지면서 힘겹게 문제를 푼 기억만 남았다. 부끄럽지만, 답답한 마음에 영문법 책 뒤쪽에 있는 한국어 해석문을 통째로 외운 적도 있었다. 영어 공부의 기억은 슬프고 어두웠다.
김성우의 ‘영어의 마음을 읽는 법’은 교과서와 문제집과 시험에 갇혀 길을 잃은 우리의 영어 공부를 비판하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문화적 지평을 넓히며 다르게 생각하는 방식을 열어주는 삶을 위한 영어 공부로 나아가는 길을 알려준다. 저자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와 서울대 영어교육과에서 오랫동안 영어 교수법과 인지언어학을 가르쳐 온 학자이다. 이 책은 2013년부터 전국영어교사모임에서 발간하는 ‘함께하는 영어교육’에 연재한 글을 바탕으로 그 내용을 다듬고 수정한 것이다.
전통적 영어 공부는 품사, 즉 단어와 문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말’을 중심으로 언어가 어떤 구조와 질서를 이루는지를 주로 살피는 것이다. 이런 공부에는 ‘인간’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말은 사람이 하는 행위이고, 그 안에는 인간의 마음, 즉 영어를 쓰는 이들의 경험과 지식, 감정과 사상 등이 담겨 있다. 그 마음을 읽는 일이 영어 공부의 중심에 놓여야 ‘살아 있는 영어’로 나아갈 수 있다.
저자는 인지언어학을 바탕삼아 이야기를 풀어간다. 인지언어학은 1970년대 이후 인지과학과 언어학의 교차로에서 태어난 ‘젊은’ 학문으로, 1990년대 이후 전 세계 학계에 널리 수용되면서 언어 이해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인지언어학은 ‘의미’에 언어 공부의 중심을 놓는다.
‘의미 있는 단어는 인간 의식의 소우주’라는 레프 비고츠키의 말처럼, 인간은 의미를 만드는 존재다. 말의 의미는 사전 내부에 고착된 게 아니라 그 말이 놓인 역사와 문화와 사회 속에서 늘 새롭게 생겨난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언제, 무슨 상황에서, 어떻게 말했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고, 누가, 어떻게 받아들였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화제작 ‘파친코’의 첫 문장이다. 이 책은 한국어로 두 번 번역됐다. 첫 번째 역자는 이를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로, 두 번째 역자는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로 옮겼다. ‘망쳐놓다’와 ‘저버리다’의 차이는 두 역자의 작품 이해와 해석을 반영한다. ‘fail’이라는 은유를 읽어 낸 결과는 이처럼 다르다. 언어는 은유로 가득하고, 단어는 사회문화적 맥락과 지식, 청자와 화자의 경험체계 속에서 역동적으로 의미를 생성한다. 언어엔 다층적 깊이가 있어서 이해의 낚싯줄을 어디까지 내리느냐가 중요하다. 저자가 ‘생각하고 느끼는 공부’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이유이다.
암기하는 영어 공부가 마음 읽는 영어 공부로 바뀌면, 단어와 문형, 품사와 문법 등에 숨은 경이로운 비밀이 드러난다. 전통적 영어 공부에서 “Everyone loves BTS.”(모두 BTS를 좋아해)와 “BTS is loved by everyone.”(BTS는 모두한테 사랑받아)은 뜻이 같다. 그러나 ‘마음’을 읽으면 의미가 달라진다.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말은 세계를 반영하는 동시에 생산한다. 권력자들은 흔히 언어의 이러한 힘을 이용해 시민 관심을 딴 데로 돌린다. 이 때문에 언어를 대할 때는 늘 다르게 생각하고 뒤집어 생각하는 노동, 즉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문법 공부에서 can, might, will 같은 조동사는 ‘동사를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틀린 건 아니나, 알아도 인생에 별 도움이 안 된다. 그러나 조동사가 없는 세계는 끔찍하다. 조동사는 우리 사는 현실이 밋밋하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can)과 상상력(will)에 열려 있으며 인간다움의 실현에 필요한 의무(might)가 있음을 알려주는 까닭이다. 조동사 공부는 문법 공부를 넘어서 이런 세계를 맛보는 일이다.
영어 공부는 단지 단어를 빠개고 문법을 정복하며 점수를 획득하고 스펙을 얻는 지루한 행위가 아니다. 타자의 생각과 감정에 접근하고, 그 안에 담긴 세계에 경이를 느끼며, 나의 사고와 경험을 확장하는 창조적 과정이다. 다소 전문적 내용도 있지만, 영어 공부에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읽고 싶다. 572쪽, 2만2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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