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장인열전] 500년 종갓집 비법 '신선주' 명인 박준미씨
"전통주에 현대감각 입힐 것" 수제자 아들과 양조기술 열공
[※ 편집자 주 = 자고 나면 첨단제품이 쏟아지는 요즘이지만, 옛 방식을 고집스럽게 지키면서 전통의 맥을 잇는 장인들도 있습니다. 비록 이들의 손을 통해 만들어진 물건이 실생활에 유용하게 쓰이지 않더라도 조상의 혼이 밴 전통문화를 후대에 전수한다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입니다. 연합뉴스는 이들이 선보이는 전통문화의 가치와 어려운 여건에도 꿋꿋하게 외길을 걷는 모습을 소개함으로써 사회적 관심과 예우 분위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충북 장인열전'을 매주 금요일 송고합니다.]
(청주=연합뉴스) 김형우 기자 = 청주 '신선주'(神仙酒)는 충북을 대표하는 전통주다. 충주 '청명주', 보은 '송로주'와 함께 제조기술이 도 무형문화재로 등록된 3대 명주로 꼽힌다.
이 술은 예로부터 물 좋기로 소문난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계원리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함양 박씨 옥계공파 종갓집에서 19대째 대를 이어 만드는 가양주(家釀酒·집에서 담근 술)로 대충 따져봐도 역사가 500년을 훌쩍 넘는다.
생약재를 찹쌀·누룩 등과 함께 발효시켜 만드는 신선주는 탁주(막걸리)와 탁주를 정제한 약주, 증류주 3종류로 나온다.
신라시대 학자인 최치원이 계원리 마을 앞 신선봉에 정자를 짓고 친구들과 이 술을 즐겼다는 유래에서 이름 붙여졌다.
오랜 역사를 입증하듯이 신선주 주조법은 1994년 도 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됐다.
여러 가지 생약재가 원료로 쓰인 만큼 한약 냄새가 날법도 하지만 정작 잘 익은 술에서는 꽃향기가 난다.
인공 첨가물 없이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숙성돼 오묘한 향기를 내는 것으로 보인다.
옥계공파의 19대손인 박준미(54)씨는 부친(2018년 작고)의 대를 이어 기능전수자가 됐다.
5년 전인 2018년 고향 마을 바로 옆인 상당구 산성동에 제법 큰 규모의 신선주 양조장을 지어 운영한다.
15일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양조장 1층에는 선반 위에 가지런히 줄을 맞춰 얹힌 누룩 덩어리가 기자를 맞이했다.
누룩은 전통주를 빚는 데 쓰이는 일종의 발효제다. 흐트러짐 없이 정리된 누룩에서 재료 하나도 소홀히 다루지 않겠다는 술 빚는 이의 정성이 느껴졌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술의 발효·숙성에 사용되는 항아리들이 눈에 띄었다.
항아리 속에서 공기 방울을 터뜨리며 보글보글 발효되는 술의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며 낯선 이를 유혹했다.
신선주는 땀과 정성의 결과물이다.
박씨는 술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쌀과 밀은 양조장 인근에 있는 1만3천여㎡의 논과 밭에서 직접 재배한다.
자경한 쌀이라도 술 빚을 고두밥을 만들 때는 백 번 정도 씻는다. 잡티와 불순물을 없애고 물기까지 걷어내야 맑은 술을 얻고 발효 기간도 줄이기 때문이다.
고두밥이 완성되면 잘게 간 누룩과 생지황, 숙지황, 인삼, 당귀, 구기자, 하수오, 우슬, 천문동, 맥문동을 한데 넣고 섞는다.
몸에 좋은 생약재가 9가지나 들어가기 때문에 술이라기보다 약에 가깝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박씨는 "소화에도 도움을 줘 우리 집안에서는 식전에 즐겨 마시던 약술"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감국과 지골피를 달인 물을 섞고 나면 항아리에 담아 한 달간 발효시킨다.
발효가 시작되면 항아리 안은 작은 연주회장으로 변한다.
어떨 때는 파도 소리가 나기도 하고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린다는 게 박씨의 설명이다.
발효가 끝나면 정제수를 추가해 술의 도수를 맞춘다. 가장 순한 막걸리는 10도, 걸러낸 증류주는 최고 42도까지 낼 수 있다.
이후 또다시 항아리에서 숙성을 시키는데, 막걸리는 한 달, 약주는 석 달, 증류주는 1년을 참고 기다려야 원하는 맛이 나온다.
박씨는 30대 후반까지 남편과 함께 건축 디자인사무소를 운영했다. 그러다가 부친의 양조사업이 어려워지자 앞뒤 가리지 않고 가업 승계에 뛰어들었다.
2남 7녀 중 여섯 번째인 그는 "아버님이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하면서 술 빚는 항아리와 양조장, 선산 등이 모두 경매로 넘어갔다"며 "다른 형제들이 술에 관심을 두지 않는 바람에 내가 얼떨결에 가업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 무렵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의 건강까지 나빠져 신선주는 맥이 끊길 위기에 놓였다.
보다 못한 박씨는 1997년부터 자신이 사는 아파트 방 하나를 비우고 처분될 뻔한 항아리들을 가져다가 술을 빚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는 신선주의 오묘한 매력에 빠져들었고, 2010년 정식으로 주조법 연구실을 마련해 아버지로부터 본격적으로 양조기술을 배웠다.
2019년 농업법인을 설립, 신선주의 대중화에 힘을 쏟은 결과 2020년 농림축산식품부의 식품명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지금은 청주대 등에서 강사로 활동하며 신선주 알리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다행히 그의 곁에는 아들(30)이 든든한 동료이자 제자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의 아들은 신선주를 세계적인 명주 반열에 올리겠다며 최근 대학원에 진학, 식품·주류 관련 공부까지 하는 중이다.
박씨는 "500년 역사가 깃든 신선주는 그 자체만으로도 희소성이 있다"며 "전통 안에 갇혀 있기보다는 현대적 감각에 맞춰 주조기술도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vodcast@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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