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표구로 읽는 근대 미술 대중화의 흐름
주목받지 못한 표구의 역사 기록
표구점-화랑 겸업 체제와 함께한
80여년 이어온 동양화 애호 흐름
표구의 사회사
기록되지 않았던 미술 이야기
김경연·이기웅·김미나 지음 l 연립서가 l 2만5000원
종이나 비단에 그린 작품의 감상과 보존, 보관, 이동을 위해 가장자리와 뒷면을 튼튼하게 보강하는 일을 ‘표구’(表具)라 한다. 동아시아에서는 옛날부터 이처럼 작품을 병풍, 액자, 족자 등의 형태로 만들어 보존하고 꾸미는 독특한 문화가 존재했다. 표구 없는 미술 작품을 만날 일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표구를 단지 작품에 종속된 것이거나 작품과 별개의 것으로 치부하곤 한다.
미술사학자 김경연(이응노미술관 책임연구원)은 <표구의 사회사>에서 “표구는 작품의 안과 바깥 사이 경계에 위치하며, 작품의 구성에 관여한다”며, 그동안 미술사에서 배제되어 온 한국 표구의 역사와 의미를 짚어본다. 표구사로서, 화랑 경영인으로서 한국 근대미술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이기웅 보영학원 이사장(전 아주서화사 경영인)의 구술 채록이 책의 출발점이 됐다. 여기에 표구사를 계승하는 한편 ‘보존과학’이라는 확장된 영역에서 활약하는 김미나(국립현대미술관 지류 작품 보존 담당 학예사)가 가세해, 기술과 방법 등 표구의 실제에 대해 해설한다.
표구는 일본에서 온 말이다. 서화의 뒷면에 다른 종이를 덧발라 보관하고 꾸미는 일을 중국에선 장황(裝潢)이나 장배(裝背)라 했고, 전통시대 한국에서도 이를 장황 또는 배첩(褙貼)이라 했다. 조선 시대 왕실에서는 도화원(도화서)에 두 명의 배첩장을 두었고, 병풍을 만드는 병풍장도 있었다. 18세기부터 한양 청계천 광통교 주변에 서화 가게들이 성업하는 등 서화 애호 풍조가 왕실과 상류층으로부터 사회 전체로 점차 확산됐고, 19세기에는 기존 배첩장보다 전문성과 안목을 인정받는 ‘장황인’이라는 전문가 집단이 생겨나기도 했다.
일본에서 쓰던 표구라는 말이 어떻게 들어와 정착했는지는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청일전쟁 이후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몰려오며 일본의 표구도 함께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청주 한씨 장황인 일가의 한응엽은 1887년 적선동에 상업 표구점을 세웠는데, 얼마 뒤 수송동으로 자리를 옮긴 이 ‘수송표구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표구점으로 1980년대까지 존속했다. 일본을 통해 유입된 표구, 그리고 ‘미술’이란 개념과 용어는 한국에서 ‘근대 미술’이란 새로운 세계가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서예가·화가인 해강 김규진(1868~1933)은 1913년 ‘고금서화관’을 설립하고 “주문에 맞춰 글씨와 그림을 그리고 빼어난 솜씨로 표구하옵니다”는 신문 광고를 냈는데, 서화의 대중화·상업화에 대한 김규진의 노력은 표구의 고급화와도 뗄 수 없는 것이었다. 표구 산업은 일제강점기 내내 발전했는데, 이를테면 당시 미술계 최대 이벤트였던 ‘조선미술전람회’는 ‘경성표구전람회’와 함께 개최됐다. 김창식, 김용복 등 일본의 표구 기술을 기초로 삼고 왕실 전통의 표구 기술을 결합해 한국의 고서화에 맞춤한 길을 모색한 조선인 표구사들도 활약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일제강점기부터 광복을 지나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 미술 대중화의 중심에는 끊임없는 ‘동양화 애호’ 기류가 있었다. “미술시장에서 동양화의 인기는 자연스럽게 표구점의 활황으로 이어졌”는데, “표구와 미술품 거래를 동시에 취급하는 표구점이자 화랑인 상점은 미술 유통 시스템 내에서 필수적이고 친숙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1970년 4월 현대화랑의 개관은 미술품 전시와 거래만을 전문으로 하는 고급 취향 전문화랑의 출발을 알렸다. 그러나 미술품 판매와 표구업의 겸업은 상대적으로 값싸고 대중적인 취향과 더불어 1980년대까지 장장 80여년 동안 이어졌다. 표구사로 시작해, 70~80년대 표구·화랑·재료상을 통합 운영했던 이기웅은 병풍 특히 자수병풍의 인기, 족자 수출 등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증언한다. 그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동양화에 대한 인식이나 취향은, 사실은 이런(제도권 교육을 받지 않은) 상업화가들이 만들어준 것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한다.
아파트가 대거 공급된 1980년대까지만 해도 동양화의 인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다만 아파트 시대에 맞춰, 한옥에서 인기를 누렸던 족자나 병풍보다는 액자를 선호하는 변화가 생겼다고 한다. 액자에 유리를 끼우게 됐고, 유명 작가들에 따라 오당식(오당 안동숙 스타일), 지목식(지목 이영찬 스타일) 등 액자의 스타일이 세분화되어 발달하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 올림픽 개최를 전후해서 제도권 내에서 동양화와 서양화의 뒤바뀐 위상이 분명해졌다.” ‘국제화’니 ‘세계화’니 하는 통치 슬로건 아래에 “동양화는 시대 흐름에 합류하지 못하는 미술로서 평가”되기 시작한 것이다. 70년대가 끝날 무렵 청전 이상범, 소정 변관식, 이당 김은호, 심산 노수현, 의재 허백련, 심향 박승무의 동양화 6대가가 모두 세상을 떠났고, 이는 더 이상 뛰어난 동양화 걸작이 시장에 공급되지 못함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과거 표구점과 화랑을 겸업했던 곳들이 전문 화랑, 갤러리로 거듭나며 동양화 외에도 서양화나 조각 등 다른 장르를 취급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됐다.
이제 과거의 표구점-화랑은 사라지고, “대량 생산 시스템을 갖춘 공장, 화랑, 문화재 보존, 그리고 소규모 표구점 등의 영역으로 쪼개져서 각자 운영”되고 있다.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전통 서화나 근대 이후 제작된 동양화의 수리와 보존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지만, 이런 작업은 과거 대중적으로 쓰였던 표구라는 말 대신 ‘보존과학’이라 불린다. 지은이는 모든 것이 “시대와 취향을 담고 변화해가는 것”이라며, 그 본질과 역사를 제대로 새기는 일의 중요성을 제기한다. 배첩장, 표구공, 표구사, 장황사, 보존과학자 등 다양한 이름 아래 “서로 닮은 듯 서로 다른 얼굴과 성격을 지니고 오늘날 표구는 존재하고 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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