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망각되는 정치

한겨레 2022. 9. 16.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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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년 4월18일 사간원 정언 유성한(柳星漢)은 정조에게 상소하였다.

4월27일 장령 유숙이 유성한의 관직을 삭탈하고 처벌할 것을 요청했다.

상소가 '사도세자가 생각나서 공부를 안 하는 거냐?'라는, 정조를 은근히 비꼬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었다.

4월30일 사헌부는 박서원의 논리를 거듭 강하게 확인하고 국청(鞫廳)을 열어 유성한을 국문하고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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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관의 고금유사]강명관의 고금유사
추석 연휴 첫날이었던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통인시장을 찾은 윤석열 대통령(왼쪽·대통령실 제공)과 8일 서울 용산역을 찾아 귀성길 시민들과 인사를 나누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오른쪽·공동취재사진)의 모습.

1792년 4월18일 사간원 정언 유성한(柳星漢)은 정조에게 상소하였다. 상소문의 내용은 경연(經筵)에 자주 참석하여 학문에 열중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광대와 기녀를 불러들인다는 풍문도 있다고도 말했다. 정조는 풍문은 사실이 아니라면서 그의 상소는 근래에 보기 드문, 꾸밈없는 진심을 담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기분이 살짝 나쁘기는 했지만, 대간(臺諫)이면 으레 할 수 있는 말이라고 본 것이었다.

사건은 엉뚱한 데로 번졌다. 4월27일 장령 유숙이 유성한의 관직을 삭탈하고 처벌할 것을 요청했다. 겉으로 왕의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이면에는 비난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는 것이었다. 유숙이 꼬집은 구절들은 그렇게 해석할 소지가 전혀 없었다.

이틀 뒤 사간원 헌납 박서원이 상소의 몇몇 구절이 불충한 뜻을 담고 있다면서 유성한의 처벌을 요청했다. 상소가 ‘사도세자가 생각나서 공부를 안 하는 거냐?’라는, 정조를 은근히 비꼬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었다. 역시 별 근거가 없는 말이었다. 정조는 당연히 요청을 수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하가 왕을 비꼬는 말을 했다는 주장이 나오는 순간 문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4월30일 사헌부는 박서원의 논리를 거듭 강하게 확인하고 국청(鞫廳)을 열어 유성한을 국문하고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상소 내용이 왕을 비난하고 비꼬는 것이라는 주장이 공식적으로 제기되자, 조정 신하들은 그 주장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좌의정 채제공과 대사헌 이성규도 사헌부와 동일한 주장을 하고 나섰다. 윤사월 2일에는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儒生) 윤면순 등 4백여 명이, 3일에는 형조 판서 이민보와 부사직 정경순이 상소하여 유성한의 처벌을 요구했다. 동일한 요청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침묵하는 자는 유성한의 패거리라는 낙인이 찍혔다. 윤사월 10일 부수찬 최현중은 유성한의 처벌을 요구한 뒤 윤구종(尹九宗)이 대간임에도 불구하고 ‘미친 병’을 핑계 대고 유성한의 성토에 동조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윤구종은 졸지에 유성한의 파당이 되었다. 그는 다른 죄까지 덤터기를 쓰고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1792년 4월부터 1792년 12월까지 <승정원일기>는 ‘유성한의 처벌’이란 주제로 도배된다. 입이 있는 자라면 같은 요청을 지겹도록 반복했다.

유성한의 처벌을 정조는 결코 바라지 않았다. 또 그를 죽여 버린다 해서 세상이 좋게 변할 것도 아니었다. 어떤 긍정적 효과도 없었지만, 당시 조정 관료들은 그를 죽이는 일에 미친 듯 매달렸다. 정작 중요한 일은 방기되고 있었다. 백성의 생업을 보살피고, 빈민을 구제하고, 부패한 관리를 징치하고, 낡은 관행과 제도를 개혁하는 일들은 깨끗이 망각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많이 보는 풍경이 아닌가.

신문과 방송, 인터넷은 정치계에서 벌어지는, 무능하고 저급한 인간들의 권력 투쟁에 대한 소식으로 넘쳐난다. 한국사회에서 정치는 오로지 그런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각인된다. 가장 두려운 것은, 이로 인해 정작 있어야 마땅한 정치, 당연히 실천해야 할 정치의 내용이 깨끗이 망각되고 만다는 것이다. 갑갑하다!

강명관/인문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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