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적수공권 '상경파'의 추억 앨범

최재봉 2022. 9. 16.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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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라는 부사어를 짐짓 앞세웠지만, 그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이 직업 저 직업 가리지 않고 돈 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극성맞게 바지런을 떨어" 댄 끝에 제 명의로 된 아파트 한 채 서울에 마련한 그의 성취감과 자부심을 누구라서 비웃을 수 있을쏘냐? "바깥에서 온갖 굴욕과 수모에 부대껴 지내다가도 퇴근하여 내 식구가 기거하고 있는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결국 해냈다'는 성취감에 젖어 까닭 없이 가슴 뻐근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이재무(사진)의 새 산문집 <괜히 열심히 살았다> 는 전후 베이비붐 세대의 추억의 앨범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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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열심히 살았다
이재무 지음 l 천년의시작 l 1만5000원

‘괜히’라는 부사어를 짐짓 앞세웠지만, 그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오죽하면 “능선을 타듯 헉헉, 숨차게 살아왔다”고 썼겠는가. “이 직업 저 직업 가리지 않고 돈 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극성맞게 바지런을 떨어” 댄 끝에 제 명의로 된 아파트 한 채 서울에 마련한 그의 성취감과 자부심을 누구라서 비웃을 수 있을쏘냐? “바깥에서 온갖 굴욕과 수모에 부대껴 지내다가도 퇴근하여 내 식구가 기거하고 있는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결국 해냈다’는 성취감에 젖어 까닭 없이 가슴 뻐근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이재무(사진)의 새 산문집 <괜히 열심히 살았다>는 전후 베이비붐 세대의 추억의 앨범을 닮았다. 가난하지만 풍요로웠던 유년기의 삽화들, 첫사랑의 아련한 기억, 적수공권 ‘상경파’로서 서울에 자리 잡고자 분투한 날들, 문단의 일원으로 겪은 일들과 만난 사람들의 자취가 책 안에 빼곡하다. 전철역을 향해 걷던 출근길에 흘러간 유행가를 흥얼거리다가 자기도 모르게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던 어느 날 아침의 일, 그가 “불쑥 생을 놓아 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가까운 이들조차 모른다는 고백은 읽는 이를 덩달아 울컥하게 만든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해인 일곱 살 여름, 엄니는 부엌에서 부지깽이 연필로 그에게 이름 쓰는 법부터 가르쳤다. 노동의 피로를 노래로 달래곤 하던 엄니한테서 그는 또 다른 문학 수업을 받았다. “그 시절 가락에 실린 노랫말의 청승과 서러움은 고스란히 유전자처럼 내 글의 정서로 전이되었다.” 열여섯 살 소년 시절 시인은 우연한 기회에 짝사랑하던 여학생과 단둘이서 호젓한 밤길을 걷게 되었다. “저온의 날씨에도 등허리엔 땀이 내를 이루고 앞가슴엔 물 묻은 손으로 전선을 만졌을 때처럼 전류가 찌르르 흐르고 있었다. 마음의 처마 끝으로 쉴 새 없이 떨어지던 기대와 설렘의 물방울 소리!” 순수하고 서툴렀던 소년과 소녀는 그러나 “끝내 한마디 말도 건네지 못하고 갈림길에서 헤어지고 말았다.”

마포의 아파트에서 종로의 사무실로 매일 출근하는 시인은 때때로 “고향 근방의 강경읍 차부에 가 있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리곤 한다. “내 생을 다녀간 얼굴들이 외화의 자막처럼 지나”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현재에 충실하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야 한다”(‘서문’)고.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천년의시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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