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시인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청혼' '그날 이후' 등 화제작 실려
상실을 목격하고 발언하는 일
"사랑의 윤회를 믿는 것 같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진은영 지음 l 문학과지성사 l 1만2000원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이렇게 시작하는 진은영의 시 ‘청혼’은 2014년에 발표되었으나 그 뒤로 오래도록 시집에 묶이지는 않은 터였다. 그럼에도 이 시는 온라인에서 널리 회자되며 큰 사랑을 받아 왔다. 진은영이 <훔쳐가는 노래>(2012) 이후 10년 만에 펴낸 시집 첫머리에 이 작품을 배치하고 그 도입부로 시집 제목을 삼은 것은 독자들의 그런 사랑에 비추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는 출간되자마자 시 부문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며 독자들의 사랑을 다시 확인시켰다.
제목에서부터 ‘사랑’을 내세운 데에서 보다시피 이것은 무엇보다 사랑의 시집이다. 시집 뒤표지에 실린 산문에서 시인은 자신이 “사랑의 윤회를 믿는 것 같다”고 썼는데, 시집 안에는 다채로운 사랑의 노래가 가득하다.
“나는 오늘 밤 잠든 당신의 등 위로/ 달팽이들을 모두 풀어놓을 거예요// (…) // 나는 사랑의 민달팽이들을 풀어놓을 겁니다”(‘당신의 고향집에 와서’ 부분)
“내 모든 게 마음에 든다고/ 너는 말했다/ 남색과 노랑의 대비처럼// (…) // 너는 말했다/ 아름다운 밤들이 모래처럼 쌓인/ 사막이 있을 거야// 밤이 에나멜 구두처럼 반짝거렸다/ 맨발로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사랑합니다’ 부분)
잠든 연인의 등 위로 민달팽이들을 풀어놓는 사랑, 맨발로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사랑…. 사랑은 신비하고 온갖 가능성으로 반짝거린다. “나는 돌멩이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건드리자 가장 연한 싹이 돋아났어”(‘사랑의 전문가’)에서 보듯, 사랑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마법과도 같다. 시인이 시집 뒤표지 글에서 쓴 ‘윤회’란 말은 마법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의 윤회를 가장 노골적이고 적극적으로 노래한 시 ‘올랜도’에서 화자인 올랜도는 자신이 사포였고 유디트였으며 햄릿의 요릭이었고 <모비딕>의 이스마엘이었다는 ‘비밀’을 들려준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 두 연에서 그의 진짜 비밀이 드러난다.
“올랜도, 나 올랜도는 모든 사람을 상실한 후에 태어났다/ 내게 남겨진 것이라고는 나 자신의 현존/ 모든 상실을 보기 위한 두 눈과/ 본 것을 말해야 할 작고 흰 입술을 가지고서// 올랜도, 우리가 모든 슬픔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사포와 유디트와 요릭과 이스마엘을 거치며 올랜도는 다시 태어났는데, 그것은 “모든 상실을 보기 위한” 것이며 “본 것을 말해야 할” 의무 때문이었다. 상실을 목격하고 그에 관해 발언하는 일을 사랑이라 한다면 그것은 시인을 비롯해 예술가들이 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하겠다. 사랑의 윤회에 관한 믿음이란 그러니까 시에 관한 믿음이라 할 수도 있는 것.
“아빠 미안/ 2킬로그램 조금 넘게, 너무 조그맣게 태어나서 미안/ 스무 살도 못 되게, 너무 조금 곁에 머물러서 미안// 엄마 미안/ 밤에 학원 갈 때 휴대폰 충전 안 해놓고 걱정시켜 미안/ 이번에 배에서 돌아올 때도 일주일이나 연락 못 해서 미안”
이렇게 시작하는 시 ‘그날 이후’는 2014년 10월15일 단원고 학생 예은이의 열일곱번째 생일에 맞추어 쓴 ‘생일시’다. 예은이는 그해 4월 세월호에 타고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이듬해 다른 생일시들과 함께 <엄마, 나야>라는 책으로 묶여 나온 이 작품 역시 많은 이들에게 읽혔다. 죽은 아이의 목소리로 된 이 시에서 예은이는 먼저 아빠와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말부터 건넨다. 자신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원망과 분노에 앞서 아빠 엄마의 슬픔을 헤아리는 아이의 마음이 너무도 예뻐서 아프다. 이어서 예은이는 “여기에도 아빠의 넓은 등처럼 나를 업어주는 뭉게구름이 있”다며 아빠 엄마를 안심시키고, 남은 친구들에게는 “우리 가족의 눈물을 닦아”주라고 당부한다. 죽은 아이의 말은 고마움의 표현으로 마무리된다.
“엄마 아빠, 그날 이후에도 더 많이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아프게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나를 위해 걷고, 나를 위해 굶고, 나를 위해 외치고 싸우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정직한 엄마 아빠로 살려는 두 사람의 아이 예은이야/ 나는 그날 이후에도 영원히 사랑받는 아이, 우리 모두의 예은이// 오늘은 나의 생일이야”
‘천칭자리 위에서 스무 살이 된 예은에게’는 ‘그날’로부터 3년 뒤, 이제 스무 살이 된 예은이에게 쓰는 편지 형식을 취한 시다. 예은이와 친구들의 희생 이후에도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똑같다/ 바뀐 그림 하나 없이// 어린 소녀에서 어린 청년으로/ 아이에서 농민으로/ 바다에서 지하도로, 혹은 공장으로”. 구의역 김군과 백남기 농민 등의 잇따른 죽음 앞에 시인은 자괴감을 떨치지 못한다. 시인은 다른 시들에서도 “꿈이 죽은 도시에서 사는 일은 괴롭다/ 누군가 살해된 방에서 사는 일처럼”(‘방을 위한 엘레지’)이라거나 “이놈의 세계는 매일매일 자살하는 것 같다/ 아무리 말려도 말을 듣지 않는 것 같다”(‘빨간 네잎클로버 들판’)라며 깊은 절망을 표한다. 시인은 사랑의 윤회를 포기한 것인가.
괴롭고 절망스럽다고 포기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시가 아닐 테다. 사랑은, 그리고 시는 죽음과 상실을 껴안고 그것들과 함께 가는 것. ‘청혼’에 이어 시집에 두 번째로 실린, 제목부터 의미심장한 시 ‘그러니까 시는’을 보라.
“그러니까 시는/ 시여 네가 좋다/ 너와 함께 있으면/ 나는 나를 안을 수 있으니까// (…) // 그러니까 시는/ 돌들의 동그란 무릎,/ 죽어가는 사람 옆에 고요히 모여 앉은”(‘그러니까 시는’ 부분)
시인은 결코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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