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죽었어야 한다".. 9·11 테러 실종자 미스터리 [세계의 콜드케이스]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2001년 9월 11일 이른 아침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조직 알카에다에 납치된 항공기 두 대가 미국 뉴욕 맨해튼 중심가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에 잇달아 충돌했다. 곧이어 거대한 폭발이 발생했고, 110층짜리 초고층 건물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참상에 전 세계가 경악했다.
가족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현장으로 몰려왔다. 넋을 잃은 채 울부짖으며 남편을, 부모를, 자식을, 친구를 찾아 달라 애원했다. 실종자 전단이 맨해튼 거리를 도배했다. 그중에는 31세 인도계 여성 의사 스네하 필립도 있었다.
9·11 테러로부터 21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실종자는 1,106명에 달한다.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어도 이들 대다수가 당시 세계무역센터와 그 인근에 있었다는 사실이 직장 동료들과 가족, 목격자를 통해 증명됐다. 그러나 스네하는 아니다. 그를 봤다는 사람도, 사소한 흔적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스네하는 그날 그곳에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살아 있기는 할까.
쇼핑하러 나간 아내가 사라졌다
스네하의 행적이 마지막으로 확인되는 날은 9·11 테러 전날인 9월 10일이다. 그날 병원 근무를 쉰 스네하는 뉴욕 자코비병원 응급실 의사인 남편 론 리버먼이 출근한 뒤 아파트를 청소했다. 오랜만에 고양이들과 놀아 주고, 난초를 큰 화분에 옮겨 심고, 오후 2시부터 2시간가량 엄마와 온라인 채팅으로 수다를 떨었다. 스네하는 “내년 봄 친구가 세계무역센터 고층에 있는 ‘윈도우 온 더 월드(Windows on the World)’ 레스토랑에서 결혼한다”면서 그곳에 들를 계획이라고 말했다.
스네하는 오후 4시 즈음 외출했다. 세탁소에 옷을 맡기고, 세계무역센터 근처 ‘센트리21’ 백화점에 가서 속옷과 드레스, 침대보, 신발을 구입했다. 결제엔 모두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신용카드를 이용했다.
그날 밤 남편 론이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집엔 아무도 없었다. 아내 스네하도 병원 밤샘 근무가 잦은 편이라 론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다음 날 아침에도 평상시처럼 일어나 바삐 출근했다. 론이 오전 9시 즈음 회의를 마치고 나오니 병원이 시끄러웠다. 항공기가 세계무역센터로 돌진하는 장면이 뉴스 속보로 나오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아파트와 세계무역센터는 불과 두 블록 거리였다. 황급히 집에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스네하의 가족과 친구들도 스네하 소식을 알지 못했다. 도시는 공황에 빠졌고, 론은 끔찍한 상상으로 몸서리쳤다. 뉴욕시 전체가 통제된 탓에 집으로 가는 길도 막혀 버렸다. 이튿날 어렵사리 도착한 집은 역시나 텅 비어 있었다. 빌딩이 붕괴하면서 발생한 먼지 폭풍이 창문으로 들어와 집안은 엉망이었다. 먼지 쌓인 바닥엔 고양이 발자국만 어지러이 찍혀 있을 뿐, 사람이 드나든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스네하의 안경과 여권, 운전면허증, 신용카드도 그대로였다. 오로지 스네하만 증발하듯 사라지고 없었다.
희생인가, 잠적인가, 피살인가
결국 론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다. 그러나 9·11 테러 수습에 압도된 경찰은 론의 호소에 귀 기울일 여력이 없었다. 론은 하는 수 없이 직접 아내를 찾아 나섰다. 유일하게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신용카드만 사라졌다는 데서 착안, 카드사에 문의해 스네하가 쇼핑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실종자 전단을 만들어 백화점 주변에 붙인 며칠 뒤 신발가게 직원에게서 제보가 들어왔다. 스네하가 실종 당일 인도인으로 보이는 여성과 함께 가게에 왔었다는 얘기였다. 백화점 보안카메라에도 스네하가 옷가게에서 코트를 둘러보는 모습이 포착됐다. 그러나 스네하는 동행자 없이 혼자였다.
가족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9·11 지원 센터로 향했다. 스네하의 남동생 존 필립은 뉴스 생방송 인터뷰를 자청했다. “누나와 통화했다. 다친 사람들을 두고 떠날 수는 없다고 하더라. ‘나는 이들을 도와야 해.’ 그것이 누나의 마지막이었다.” 물론 전부 다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언론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고, 스네하는 ‘9·11 영웅’으로 포장돼 전파를 탔다.
사실 처음엔 가족들도 실종 당일 행적에만 집중했다. 스네하가 어디선가 살아 있을 거란 믿음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9·11 테러와의 연관성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경찰에게 수사 의지가 없다고 판단한 론은 연방수사국(FBI) 요원 출신 사설 탐정 켄 갤런트에게 사건을 맡겼다. 켄은 ①스네하가 개인적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회적 혼란을 틈타 스스로 잠적했거나 ②납치와 살인 등 범죄 피해를 당했을 가능성 등을 조사했다. 그러나 스네하의 컴퓨터에서도, 지인들 인터뷰에서도 수상한 정황은 발견되지 않았다. 9·11 테러 당일 오전 8시 43분 아파트 보안카메라에 스네하와 닮은 여성이 찍히기도 했는데, 그 여성은 쇼핑백을 들고 있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잠시 기다리다가 뒤돌아 나가 버리는 모습도 의문스러웠다.
론과 켄은 오랜 고민 끝에 결론 내렸다. 귀갓길에 끔찍한 참사를 목격한 스네하가 의사로서 현장으로 달려갔고, 사람들을 구하다가 빌딩이 무너져 숨졌을 것이라고. 스네하의 실종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정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9·11 테러뿐이었다. 가족들은 애끊는 심정으로 그렇게 스네하를 가슴에 묻기로 했다.
경찰 조사로 드러난 반전… 스네하는 어디에?
경찰도 초기엔 가족들 의견대로 스네하를 9·11 영웅이자 희생자로 여겼다. 그런데 수사가 진행되면서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스네하는 연초 일했던 카브리니병원에서 음주 문제와 상습 지각으로 해고된 상태였다. 얼마 후 동료 의사들과의 술자리에서 성추행을 당했다며 신고했으나 경찰은 혐의가 없다고 판단, 스네하는 무고죄로 기소돼 재판도 진행 중이었다.
스네하가 근래 몇 달간 레즈비언 술집에 자주 들르면서 그곳에서 만난 여성들과 밀애를 즐겼고, 심지어 남동생 존의 여자친구(현재 아내)와 성관계를 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새 직장인 세인트빈센트병원에서도 알코올 중독 상담사와의 면담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정직 처분을 받은 것으로 파악됐다. 실종 당일 오전에는 무고죄 관련 재판에 출석했다가 남편 론과 크게 다투기도 했다. 경찰은 “스네하가 9월 11일에 다른 곳에 있었거나 이미 사망했을 것”이라고 결론 지었다.
결국 2004년 뉴욕시 검시관은 “스네하가 9·11 테러 당시 살아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며 공식 희생자 명단에서 스네하를 삭제했다. 2005년 법원은 스네하의 사망일을 2001년 9월 11일로 지정해 달라는 가족들의 청원도 기각했다. 2006년 6월에는 실종 뒤 3년이 경과한 날을 공식 사망일로 간주하는 뉴욕 주법에 따라 스네하의 사망일이 2001년 9월 10일로 확정됐다.
가족들은 망연자실했다. 스네하가 병원에서 해고된 건 인종차별과 성차별 문제를 폭로했기 때문이며, 레즈비언 술집에 만난 여성들과는 우정을 나눴을 뿐 가정 불화는 없었다고 반박했다. 남동생 존도 자신의 여자친구와 누나가 성관계를 가졌다는 경찰 설명은 터무니없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론은 “경찰이 늑장 수사를 무마하려고 조사 보고서를 온통 조작했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다시 뒤집힌 판결… 새로운 단서 나올까?
가족들은 슬픔과 원망을 억누르며 스네하의 명예 회복을 위해 싸웠다. 론은 “설사 경찰 조사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스네하 실종을 설명해 주진 못한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또 “스네하가 9·11 희생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마찬가지로 그가 범죄 피해자이거나 가출자인 증거도 없다”고 반박했다.
오랜 법정 투쟁 끝에 재판 결과는 또 뒤집혔다. 2008년 1월 항소법원은 “가장 간단한 설명이 가장 사실에 가까울 가능성이 크다”고 판결했다. 즉, 스네하가 세계무역센터에서 사람들을 돕다가 사망했다는 가설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판단이었다. 가족들은 스네하의 사진을 부여잡고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해 9·11 테러 7주년 추도식에서 스네하는 2,751번째 희생자로 명명됐다. 추모비에도 이름이 새겨졌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 스네하는 여전히 장기 실종 상태다. 가족들은 최첨단 DNA 기술이 참사 현장에서 수습된 작은 뼛조각들에서 스네하를 찾아낼 거라 믿고 있지만, 아직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스네하가 9·11 희생자가 아니라는 의혹도 말끔히 가시지 않았다. 뉴욕 지역 방송인 WABC는 올해 9·11 테러 21주년을 맞아 지난 13일 스네하 실종에 의문을 제기하는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가족들은 제작진의 인터뷰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다만 스네하의 엄마는 짧은 메시지를 보내 왔다. “실종자 프로그램과의 인터뷰에 관심 없다. 왜냐하면 나는 딸이 실종됐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딸은 세계무역센터에서 숨졌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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