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브스夜] '꼬꼬무' 윤미정, "내가 아들을 죽였다"..이방인 엄마의 살인 고백, 그 진실은?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아들 살인 고백했던 엄마, 왜 진술 번복했나?
15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이방인 엄마의 살인 고백, 295호의 비밀'이라는 부제로 1987년 콜로니얼 호텔 295호실의 그날을 조명했다.
지난 1987년 5월 28일 새벽,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시골 마을 잭슨빌에서 구조 요청이 왔다. 구조 요청을 한 이는 윤미정 씨. 그는 아이를 살려달라고 했다.
이에 경찰과 구조대원이 급히 그가 구조를 요청한 콜로니얼 호텔 295호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이 발견한 것은 두 살 반 정도 되는 남자아이의 사체였다. 그리고 곁에는 한 살배기의 여자 아이가 있었다.
배와 등에 멍이 든 채로 숨을 쉬지 않고 있던 남자아이. 윤미정 씨는 아이가 서랍장의 문을 열어 밟고 TV를 만지다가 서랍장이 넘어오며 아이가 사고를 당한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I killed my son." 내가 아들을 죽였어요 라며 자백을 했고, 이에 경찰은 그를 체포했다.
그런데 이후 윤 씨의 진술은 번복됐다. 재판에서 그는 아이를 죽이지 않았다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리고 재판 내내 울다 웃다 흥분하다 심한 감정 기복을 보였고, 이에 배심원들은 윤 씨의 살인죄가 유죄라고 판단했다. 이에 법원은 그에게 20년 징역형을 내렸다.
그리고 2년 후 노스캐롤라이나의 유일한 한인 변호사 서승해. 그는 윤 씨가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와 만났고, 조사를 시작했다. 서승해 변호사는 윤 씨와의 대화를 통해 그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에 서승해 변호사는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조사했다. 사건 현장이었던 호텔로 간 변호사. 그리고 그 호텔의 주인은 윤 씨가 절대 아이를 죽일 사람이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혼자 아이를 키우며 일을 하려는 윤 씨에게 방 한 칸을 내주고 본인 가게에 취직까지 시켜줬던 것. 그리고 윤 씨는 일하는 내내 성실했고 시종일관 아이들을 사랑하는 엄마의 모습 그 자체였다는 것.
이어 호텔 주인은 윤 씨의 방 바로 아래 살고 있었는데, 사건이 있던 그날 밤 9시경 무언가가 쿵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그 시간은 윤 씨가 일을 하기 위해 방을 비운 시간이었다.
서 변호사는 호텔에서 돌아와 재판 기록을 재확인했고, 경찰 조사 때부터 재판에서까지 통역관이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영어가 부족했던 윤 씨는 자신의 상황이나 사건이 돌아가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윤 씨가 영어로 설명을 하는 것들은 모두 오해당해서 잘못된 것들이 많았던 것이다.
엉터리 영어로 윤 씨는 자신의 결백을 위해 자신이 아는 말만 반복하며 눈물로 호소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자 교민들은 윤 씨가 정말 억울하게 감옥에 간 것이 아니냐며 분노했다.
하지만 담당 검사는 윤 씨가 영어를 못했다고 배심원들이 진실을 파악하지 못하거나 오해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윤 씨의 사건은 한국에까지 알려졌고, 이에 1992년 '그것이 알고 싶다'팀은 당시 MC였던 문성근 배우까지 대동을 해서 서 변호사와 함께 윤 씨를 만났다. 당시 이미 5년째 복역 중이었던 윤 씨.
그는 사건 당일 사고가 났던 방을 치운 이유에 대해 딸을 빼앗길까 봐 겁이 나서 그랬다고 설명했다. 윤 씨는 "미국은 방이 지저분한 것도 아동학대라고 생각한다. 그걸 트집 잡아서 딸을 데려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방을 치웠다"라고 했다.
충남 서산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윤 씨는 아버지를 여의고 소년 가장이 된 오빠가 생활고로 힘들어하자 그 짐을 덜어주기 위해 열여섯의 나이에 집을 나왔다. 이후 그가 간 곳은 미군 부대 근처 기지촌으로 향했다. 미군과 결혼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이야기로 아메리칸드림을 품고 그곳으로 갔었던 것.
미군과 결혼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간 윤 씨가 첫 아이를 낳은 것은 스무 살 일 때였다. 그런데 미국에 도착한 후 남편은 달라졌다. 마약을 하며 폭력을 일삼았고, 이에 윤 씨는 이혼을 하고 딸은 본인이 키우기로 했다. 하지만 혼자 일을 하고 아이를 돌보는 것은 쉽지 않았고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생활고 때문에 아이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후 백인 남편과 두 번째 결혼을 한 윤 씨는 스물넷에 아들을 낳고 다음 해 이어 딸을 낳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똑같았다. 아니 더 심했다. 이번 남편은 본인뿐만 아니라 아이에게도 폭력을 행사했고, 이에 결국 윤 씨는 아이들을 데리고 도주했다.
배우자 몰래 자식을 데리고 나오면 납치가 되며 아이들을 빼앗기는 것이 법이었기에 윤 씨는 남편 눈을 피해 시골 마을인 잭슨빌까지 간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고가 난 것.
아이들의 양육을 위해 일을 할 수밖에 없던 윤 씨. 이에 윤 씨는 아이들 둘만 남기고 문은 잠그고 TV는 켜 둔 채로 출근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신고할까 봐 겁이 나서 한 행동이었다.
사건 직후 윤 씨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베이비시터를 두지 않은 것 때문에 자기가 끌려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경찰에 체포가 된 결정적인 이유였던 자백. 이를 한국어로 바꾸면 자식을 잃은 부모가 하는 자책의 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들 입장에서 이는 명백한 자백이었고, 이는 문화적 차이에서 온 오해였다.
그러나 이것이 오해라고 해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윤 씨가 아이를 죽이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이상 어떤 것도 바꿀 수 없었던 것.
서 변호사는 사건 현장에 있던 서랍장과 TV를 가지고 아이가 혼자 서랍장을 넘어뜨리는 게 가능한지 실험을 했다. 공신력을 갖기 위해 유명 교수를 대동하고 실험을 진행했고, 그 결과 아이와 TV의 무게가 합쳐지면 서랍장이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아이의 멍자국은 서랍장에 오랫동안 눌려 생긴 자국으로 추정됐고 이는 아이의 사인인 흉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와 연결되는 부분이었다.
윤 씨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 필요한 재심은 쉽지 않았다. 이에 서 변호사는 사면을 신청했다. 그리고 한국과 교민 사회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윤 씨의 석방 운동이 시작됐다. 여성을 위한 한인교회 여금현 목사를 필두로 여성 인권 운동의 대명사인 기지촌 여성 인권 운동가 문혜림 여사와 그의 딸 문영미까지 모두 운 씨의 구명 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탄원서가 주지사 앞으로 소나기가 쏟아지는 것처럼 쏟아졌다. 누구가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며 한국인뿐만 다른 외국인까지 그의 구명 운동에 앞장섰다.
1992년 12월 30일 윤 씨의 석방이 결정됐다. 그러나 이는 사면이 아닌 가석방이었다. 무죄를 완전히 인정받지는 못했던 것이다.
윤 씨는 여 목사의 배려로 뉴욕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그런데 딸에 대한 그리움이 극에 달했고, 그를 딱하게 여긴 여목사의 도움으로 딸을 10년 만에 다시 만났다. 하지만 1살 때 헤어진 후 처음 엄마를 만나는 딸에게 윤 씨는 그저 낯선 사람이었다. 어색한 것은 윤 씨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에게 선물만 주고 자리를 떠난 윤 씨. 그는 언젠가 다시 딸과 만나기 위해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윤 씨는 "내가 왜 미국 사람이 아닌가. 왜 내가 영어를 잘 모르는가. 왜 나는 세상에 뒤떨어져있나"라며 "조그만 감옥에서 큰 감옥으로 나온 거 같다"라고 석방이 된 후에도 고통 속에 살았다.
방송 취재 중 22년 만에 미정 씨를 찾아낸 제작진. 오랜만에 만난 미정 씨는 뜻밖의 모습이었다. 작년 12월 21일 크리스마스를 4일 남기고 한국에서 사망했던 것.
사실 윤 씨는 2006년 미국에서 추방당했다. 당시 그의 다큐를 준비하고 있던 이호섭 감독님. 그는 당시 윤 씨가 지내던 쉼터에 그의 안부를 물었더니 쉼터를 나가서 노숙자 생활도 하다 경범죄에 걸려서 감옥에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에 이호섭 감독은 "자식을 잃은 부모의 고통이 세상 어떤 고통보다 가장 클 것이다"라며 "어느 기간은 딸과 함께 하기 위한 동력으로 살아갔겠지만 그는 이미 아들이 죽을 때 같이 죽은 게 아닌가 싶다"라고 말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리고 이날 방송에서는 이호섭 감독이 그가 한국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 모습이 포착된 사진이 공개됐다. 사진 속 윤 씨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표정이었고 그 표정에서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윤 씨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고향에 가서 가족을 만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고, 한국에서도 미국에서처럼 쉼터와 길거리를 오가다가 지난해 간암으로 홀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은 어느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는 가장 쓸쓸한 장례식이었다.
어디에서나 이방인이었던 윤 씨. 희망을 갖고 미국으로 갔지만 그런 그의 희망은 덧없이 하나하나씩 사라졌다. 윤 씨에 대해 문영미는 "언니의 죄는 가난한 집의 딸로 태어난 것이 유일한 죄"라며 "이 모든 게 언니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라고 말해 공감을 자아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송은 윤 씨가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닌 가장 행복한 곳으로 간 것이 아닐까라며, 아들과 기억에 남는 첫 크리스마스를 보냈기를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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