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누구를 위한 소액심판인가
대한민국 최대 명절인 한가위를 맞이했다. 필자 역시 기쁜 마음으로 일가친척을 만나러 갔다. 도란도란 친척과 이야기를 하던 중 동네 청년 재판이야기가 나왔다. 청년은 창업을 위해 모아둔 2000만원을 친구에게 빌려 주었는데 친구가 갚지 않아, 민사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를 했다고 한다. 청년은 판결에 불복하기 위해 판결문을 읽어봤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판결문에는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소송비용은 원고가 부담한다”라는 2줄이 전부였다고 했다. 친척은 이런 판결문이 가능한지 물어왔다. 순간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법이 그렇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법원 판사 수가 적어 하는 수 없다”고 해야 할까. 이도저도 아니면 “얼마 안 되는 소액이니 그냥 참고 살면 어때”라는 궤변을 해야 하나.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독자들도 “이런 판결문이 가능해?”라고 놀랄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2021년 기준 최근 5년간 1심 민사 본안 사건은 매해 평균 98만1296건이다. 이 중에서 소액 사건은 71만691건으로 72.4%를 차지하고 있다. 민사소송을 제기한 국민 4분의 3 정도가 패소 이유를 모르는 판결문을 받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소액사건은 뭘까? 소액사건심판법과 대법원규칙에서 3000만원을 초과하지 않는 민사사건을 소액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럼 왜 3000만원 이하 소액사건 판결문은 이렇게 간단한 걸까? 이 역시 법에 답이 있다. 소액사건심판법 제11조의 2 제3항에 “판결서에는 민사소송법 제208조의 규정에 불구하고 이유를 기재하지 아니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3심제도가 보장되어 있다. 1심에 불만이 있는 경우 2심에서 다툴 수 있다. 다투기 위해서는 1심에서 ‘왜’ 패소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판결문에 ‘이유’가 없다면 ‘왜’를 알 수 없다. 무엇을 가지고 항소를 한단 말인가. 2021년 기준 최근 5년간 평균, 판결문에 판결이유가 기재된 경우 항소 비율은 22.3%에 이르고 있지만 소액심판사건 항소 비율은 4.1%에 그치고 있다. 이유가 기재되지 않는 판결문은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알권리와 재판을 받을 권리를 제한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회·문화적 차이가 있겠지만 미국과 프랑스는 소액사건에 있어 ‘이유’를 적시하도록 하고 있다. 독일의 경우 당사자 동의 혹은 이유 근거가 되는 내용이 녹음되어 있는 경우 이유 기재를 생략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 국회에 2020년 2건, 2021년 1건의 소액사건심판법개정안이 제출되었다. 그러나 해당 법안은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된 후 지금까지 아무런 진척이 없다. 최근 대법원도 대책을 내어 놓았다. 골자는 정원 외로 소액 사건을 전담하는 법관을 늘리고, 법관 정년을 10년 정도 연장하자는 것이다.
신속한 재판은 필요하다. 그러나 신속한 재판이 헌법상 기본권에 앞설 수 없다. 민사사건의 70%를 차지하는 소액심판에 ‘이유’를 기재하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규정한 소액사건심판법은 개정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당위가 현실을 반영하지 않으면 유토피아적 이상향에 지나지 않는다. 1년에 법관 한 명이 처리하는 소액사건은 4000건에 이른다. 하루 8시간 꼬박 해도 한 사건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0분 남짓이다. 법관에게 할 수 없는 일을 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국회는 현재 3214명으로 되어 있는 각급법원판사정원법을 개정해 법관의 수를 늘려야 한다.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도 법관 증원 필요성에 대해 결의한 바 있다.
국민의 알권리와 재판청구권을 보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국회는 국회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또 대법원은 국민을 위해 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국민을 위한 소액심판이 되어야 할 때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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