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난장] 지석영과 부산의 소중한 인연
뜬금없는 장소에 공덕비..市차원 업적 재평가 필요
몇 년 전의 일이다. 사돈 어르신의 안내로 금강공원에서 ‘지석영 선생 공덕비’를 발견했다! ‘종두법’의 지석영 공덕비가 왜 이곳에 있을까? 부산과 무슨 인연이 있는지 무척 궁금했다.
지석영은 1855년 서울 관훈동에서 유의(儒醫·한의학을 독학으로 배워 의술을 베푼 사대부)의 아들로 태어나 명의 박영선에게 한의학을 배웠다. 1876년 박영선은 수신사 일행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준텐도의원에서 우두접종법의 존재를 알았고, 일본 의사가 쓴 ‘종두귀감(種痘龜鑑)’을 구해 지석영에게 전해준다. 마마로 불린 두창은 지금의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전염병으로 치료법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예방할 수 있다는 사실에 청년 지석영은 분명 마음이 설��을 테다. 하지만 책으로는 한계를 느낀 지석영은 접종법을 직접 익히기 위해 1879년 가을 부산초량왜관에 있던 국내 최초의 서양식(일본식)병원인 제생의원(濟生醫院)을 찾아간다. 두 달간 접종법을 익힌 지석영은 접종바늘과 두묘(痘苗·백신)를 얻어 서울로 간 뒤 이듬해인 1880년 2월에 ‘우두국(私設)’을 세워 우두접종을 시작했다(25세).
하지만 두묘, 즉 백신이 부족하자 188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는 수신사 일행에 합류해 일본 내무부 위생국에서 우두 채취·제조·저장법을 익혔다. 이제 조선에서도 우리 손으로 백신 주사액을 만들 수 있게 된 지석영은 가을에 ‘종두장’을 열고 접종을 재개했다. 하지만 1882년에 임오군란 때 지석영은 친일파로 몰려 종두장은 불에 타버린다.
1883년에 관직에 나가기 위해 과거에 응시, 급제한 후(28세) 성균관과 사헌부에서 일했고 공주에 우두국을 세운다. 지석영의 개인적인 노력이 빛을 발했을까? 1885년이 되면 조선 정부도 우두접종에 관심을 가져 국가 차원의 접종사업을 시작한다. 지석영은 접종의사인 ‘종두의(種痘醫)’를 양성하고 우두접종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우두신설(牛痘新說)’도 쓴다. 이제 우두국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양성된 종두의들도 지방으로 파견되면서 접종사업도 자리를 잡을 만했는데 갑신정변 실패 후인 1887년에 친일개화파로 몰려 전남 신지도에 유배된다. 두창이 창궐하자 5년 만인 1892년에 해배, 서울로 돌아와 관직 없이 개인 자격으로 접종을 시작한다. 개화파의 집권으로 복권된 지석영은 1895년에 동래부사(나중에 행정조직 개편으로 동래부관찰사)로 임용돼 부산으로 온다. 제생병원에서 우두를 배운 지 16년 만에 부산과 다시 인연을 맺는다. 당시 동래부(東來附)는 지금의 동래구(東萊區)와 달리 영남 동쪽지방 전체를 의미했고, 지석영은 동래부의 행정수장이었다. 하지만 1895년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으로 개화파가 실각하자 지석영은 부산을 떠난다.
지석영은 정부 차원에서 근대 의학교육이 필요하다는 청원서를 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1899년에 서울 관훈동에 대한제국 정부가 세운 관립(官立) 의학교가 개교했다. 법관 양성소와 함께 국내 최고 고등교육기관이 된 의학교 교장은 존속기간 내내 지석영이 맡았다(1899~1907년). 짧은 기간이었지만 의학교는 1902년에 처음으로 근대 의학 교육을 받은 의사 19명을 배출했다. 졸업생 대부분은 대한제국의 군의관으로 활동했다.
을사늑약 이후 조선이 일본의 손아귀로 넘어가던 와중인 1907년에 이름과 달리 일본인이 좌지우지하는 ‘대한의원’이 개원한다. 의학교는 이곳으로 통합되고 지석영은 교장에서 대한의원 학감으로 강등되는 치욕을 겪었다. 1910년 강제 병합 후에는 대한의원이 총독부의원으로 바뀌었고 지석영은 내쫓기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지석영은 의생(醫生·지금의 한의사)으로 등록하고(58세) 계동에 유유당(幼幼黨)을 열어 소아 진료를 하고 우두접종을 하며 말년을 보낸다. 1935년에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87년 서울대병원 구내에 보존된 옛 대한의원 본관 앞에 지석영의 동상이, 1988년엔 금강공원에 후손이 기념비를 세웠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두 곳 모두 어색하기 짝이 없는 장소다. 일제의 손아귀에 든 대한의원은 사실상 지석영을 내쫓은 곳이다. 금강원은 원래 일본 사람들이 동래 온천을 찾는 자국민을 위한 공원으로 조성해 오늘에 이른다. 비록 일본인에게 의술을 배웠지만 일본 총독부와는 악연이 있었던 선생이 지하에서 무척 애석해하시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디가 적절할까? 동래부 관아가 있던 수안동이나, 제생병원이 있던 광복동이 좋을 것 같다. 아니, 아예 이 기회에 부산시 차원에서 근대적인 백신접종사업을 도입한 지석영의 역사적 업적을 재평가하고 부산과 가진 소중한 인연을 다시 한번 재발견해보면 좋겠다. 장기려 박사, 스웨덴야전병원이라는 소중한 자원을 가진 부산에 지석영 이야기도 더해지면 근대의학의 중심도시로 재조명해볼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박지욱 신경과 전문의·메디컬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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