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의 어텐션] 디즈니의 '흑인 인어공주'
내 우상은 백인이었다. 어쩔 도리 없는 일이다. 나는 할리우드 영화와 함께 성장했다. 유년기의 영웅들은 항상 하얀 얼굴을 갖고 있었다. 나는 인디아나 존스가 되고 싶었다. ‘스타워즈’의 한 솔로가 되고 싶었다. 1980년대에는 한국적 혹은 아시아적 영웅이 거의 없었다. 모든 아름답고 강하고 위대한 것은 하얀색이었다.
1980년대 초에는 새로운 패션 브랜드들이 탄생했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아이템을 팔던 ‘이랜드’는 혁명적이었다. 시장 보세밖에 선택지가 없던 시절의 아이들은 모두 이랜드를 입고 싶어 했다. 패션에 눈을 뜨기 시작한 나도 이랜드 계열의 브랜드들에 완전히 매혹됐다. 40대 이상 독자라면 같은 회사가 내놓은 브렌따노, 언더우드 같은 브랜드의 옷을 입고 자랐을 것이다.
이랜드는 미국의 ‘프레피 룩’에 기반하고 있었다. 프레피는 미국 동부 사립학교 학생들을 의미하는 단어다. 매장에 가면 컬러 화보를 무료로 나눠줬다. 모델은 모두 백인이었다. 나는 동양인과 피부색, 체격이 다른 모델로 가득한 화보를 뚫어지게 보곤 했다. 집에 놀러 온 어머니 친구가 물었다. “그게 그렇게 좋아?” 나는 답했다. “저도 이렇게 생겼으면 좋겠어요.” 나는 어머니 친구의 단호한 말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 네가 백인이 될 수는 없는 거니까.”
디즈니의 ‘인어공주’ 예고편이 얼마 전 공개됐다. 1989년 작 애니메이션을 기반으로 한 실사 영화의 주인공은 ‘흑인’ 가수 핼리 베일리다. 인터넷은 난리가 났다. 사람들은 디즈니의 ‘정치적 올바름’ 정책이 원작을 망쳤다고 했다. 정치적 올바름이란 인종, 성별 등의 편견에서 벗어나자는 운동이다. 새로운 ‘스타워즈’ 주인공을 여성과 흑인이 맡거나 마블 영화의 주인공을 여성이나 성 소수자로 설정하는 것도 이 문화적 운동이 만들어낸 결과다.
‘인어공주’ 예고편에는 ‘좋아요’보다 ‘싫어요’가 세 배나 많이 달렸다. 한국의 많은 영화 커뮤니티에도 유년기의 추억을 망치지 말아 달라는 비명들이 올라왔다. 그런데 우리 유년기의 추억이 대체 무엇인가. 빨간 머리를 한 백인 인어에 대한 사랑? 우리는 지금 물속에서도 공기 호흡으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하반신이 생선인 존재를 논하는 중이다. 랍스터가 “저 바다 밑에서는 아무도 우릴 튀겨서 먹지 않아”라고 노래하는 세계의 주인공 얼굴이 흰색에서 검은색으로 바뀌었다고 우리의 유년기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검은 인어든 하얀 인어든 쥐만 잘 잡으면, 아니, 노래만 잘하면 된다.
‘오징어 게임’으로 에미상을 받은 이정재가 새로운 ‘스타워즈’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 지금 아이들은 한국인 배우가 우주적 영웅으로 활약하는 걸 보면서 자랄 것이다. 이랜드 전단 백인 모델처럼 되고 싶어 하던 세대의 인종적 열등감은 비로소 멋지게 붕괴됐다. 그런 유년기의 추억은 저 바다 밑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김도훈 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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