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칼럼] 朱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중국서도 오래전 죽어 사라진 주자가
한국 좌파 진영에선 펄펄 살아 날뛰니 기가 막힌 일이다
유교의 본산 성균관이 추석 전 발표한 차례상 가이드 라인을 보고 배신감을 느꼈다는 사람이 많았다. 성균관은 상차림이 9가지를 넘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전도 부치지 말라고 했다. 산적·나물·포·탕에서 배·사과·대추며 송편·약과까지 5열 횡대로 상을 꽉 채워야 예의인 줄 알았던 사람들로선 “왜 이제야...” 하는 생각일 것이다. 그동안 우린 무엇 때문에 ‘조율이시’ ‘홍동백서’ ‘좌포우혜’ 같은 영문 모를 규칙에 시달려야 했나. 명절 때마다 전 부치느라 허리 휘었던 어머니들과 며느리들의 고생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성균관 설명대로 유교 예서(禮書) 어디에도 차례상을 이렇게 차리라는 규정은 없다. ‘주자가례’엔 제철 과일과 술 한 잔 올리라는 것이 전부다. 간소하게 지내라는 게 유교 예법인데 양반들의 체면치레 과시욕에 편승해 상다리가 부러져야 직성 풀리는 한국형 허례허식으로 변질됐다. 유교 문화권에서도 사과가 동쪽이니, 배가 서쪽이니 따지는 나라는 우리뿐이다. 유독 한국에서만 유교식 교의가 합리성을 벗어나 형식적 도그마로 폭주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중문학자 김경일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가 벼락 같은 충격을 준 것이 1999년이었다. 유교 이데올로기가 망국을 부른다는 이 책은 IMF 환란의 참담한 상황 속에서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다. 신분 질서와 가부장제, 혈연·지연·학연 중시, 획일성, 여성 억압, 기득권 옹호 같은 유교적 가치가 국가 발전을 막는다는 것이었다. 중진국 함정에서 허덕이다 외환위기를 맞아야 했던 한국적 병폐에 대한 통렬한 고발이었다.
그러나 이 책의 주장엔 치명적 오류가 있었다. 동아시아 유교권 국가들이 고도성장을 이룬 사실과 모순된다는 점이었다. 한국·중국은 물론 ‘4룡’으로 불린 대만·싱가포르 등도 유교 전통을 기반으로 하는 나라다. 뜨거운 교육열과 근면·검약의 노동 윤리, 입신양명의 성취욕 같은 유교적 가치가 동아시아의 성공 토대가 됐음은 부인 못 할 사실이다.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서구 자본주의를 배태했듯이, 유교의 긍정적 효과를 주목하는 ‘유교 자본주의론’은 또 하나의 발전 이론으로 인정받고 있다. “공자를 죽여야 한다”는 김경일의 거친 도발은 이 사실을 무시하고 있었다.
유교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실천적 학문이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로 표현되듯, 실세상에 써먹기 위한 자기 계발론이자 처세술, 정치 윤리에 가까웠다. 공자·맹자는 먹고사는 실용의 가치를 중시했다. 공자는 “먼저 백성을 부유하게 해주라” 했고, 맹자는 “물질이 있어야 마음도 생긴다”(無恒産無恒心)고 했다. 그랬던 유교가 관념론으로 흐른 것은 12세기 주자가 집대성한 성리학 때문이었다. 선불교·도교에 영향받은 주자가 우주론, 인간 본성론에 매달리면서 실천 윤리이던 유교를 형이상학적 철학 체계로 바꿔 놓았다.
중국에서 성리학은 유교의 한 분파에 불과했고, 16세기 이후엔 양명학에 밀려 퇴조했다. 그런데 조선에 전파되면서 모든 이설(異說)을 말살하는 압도적인 지배 이데올로기가 됐다. 조선의 사림(士林) 정권은 성리학 극단주의에 빠져 정신 승리의 길을 치달렸다. 물적 생산을 천대하고, 실용적 변화에 문을 닫았으며, 이(理)냐 기(氣)냐의 관념 투쟁과 상복을 1년 입느냐, 3년 입느냐 같은 형식 논쟁으로 날밤을 새웠다. 중화 질서에 스스로를 종속시킨 것도 모자라 ‘소(小)중화’를 자처할 지경이었다. 성리학 원리주의가 조선을 망국으로 이끌었다. 그러니 공자가 아니라 ‘주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해야 옳았다.
환란 이후 한국 사회는 유교적 폐단에서 탈피하기 위한 많은 변화를 겪었다. 각 분야에서 개방화·민주화가 진전되고 가부장적 억압, 정실·연고 중시의 폐습이 확연히 줄었다. 세계에서 통하는 창의적 인재들이 속속 등장하고, 기업들은 혁신의 힘으로 약진하고 있다. ‘오징어 게임’과 BTS로 상징되는 K컬처의 성공은 한국을 유교적 획일성의 나라로 규정할 수 없음을 입증해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중국 중심의 사대적 세계관에 빠진 주자의 후예들이 있다. 중국 앞에선 한없이 작아지는 친중 좌파 집단이 그들이다.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로, 한국을 “작은 나라”로 지칭하며 중화 질서의 복원을 의미하는 ‘중국몽(夢)’에 동참하겠다던 전직 대통령이 있었다.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시진핑 발언에도 침묵하고, 현실 대신 이념의 성에 갇혀있는 자폐적 정치 세력이 지금 국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렇게 중국을 숭모하는 집단이 일본 얘기만 나오면 ‘토착왜구’ 운운하며 깔보고 적개심을 감추지 않는다. 조선조 사림의 ‘소중화’ 의식과 다르지 않다. 중국에서도 죽은 지 오래인 주자가 한국의 좌파 진영에선 펄펄 살아 날뛰고 있으니 기가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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