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한반도 남북 분단 결정지은 건 1945년 9월 스탈린의 지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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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이후 많은 좌파 인사들은 대체로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수립을 ‘한반도 분단을 고착화한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분단을 처음 결정적으로 언급한 것이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라고 봅니다. 이승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기 휴회된 공위(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세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해야 할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분단을 낳은 발언이고, 분단의 원흉은 이승만과 대한민국이었을까?
솔직히 말해서 정말 그런 줄 알았습니다. 1990년대 소련이 붕괴되고 막대한 분량의 비밀문서가 공개되기 전까지는 말이죠.
최근 출간된 한 저작에선 그 동안 우리가 듣도보도 못했던 1945년 종전 직후의 한 국제회의에 대한 언급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런던외상(外相·외무장관)회의’ 입니다.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의 ‘역사관과 역사학자’(북코리아) 입니다.
이 책은 역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첫 장을 펼쳐드는 순간 푹 빠져들게 되는 ‘한국사 최고 논쟁의 끝판왕’ 같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황사영 백서(반역자인가 민권운동가인가), 동학농민봉기(민중민주주의 운동인가 민란인가), 대한제국(국민국가인가 전제국가인가)처럼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되고 논쟁이 끝없이 이어지는 사안들을 자세히 해설하고 자신의 의견까지 제시한 책이니까요. 하지만 아이고 참, 이런 제목과 표지라면 도대체 누가 사서 읽을까 좀 답답하기도 합니다.
이 책에선 이런 말도 했습니다.
인간은 한 시대의 지배적 정신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민족과 민중 같은 거대담론이 횡행할 때 개인은 없다. 이데올로기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대에 자신들이 상상하는 세상에 정당성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개인 동원을 위한 거대담론의 수사(修辭)인 민족과 민중은 일란성 쌍둥이다.
1990년대 초에 이런 말을 좀 들었어야 했는데, 원.
아무튼 이 책의 4장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보이는 현대사 서술의 문제점은 무엇인가?’에서는 1980년대 좌파 수정주의(revisionism)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소련을 ‘세계 민족 해방을 선도하는 나라’, 미국을 ‘제국주의 야욕을 지니고 세계로 팽창하며 약소 민족을 압박하는 나라’로 보고 교과서 집필을 맡아 온 것이 큰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이런 큰 그림 속에선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가 되며 ‘자유민주주의’와 ‘남침’은 교과서에서 삭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 ‘분단 고착화의 책임은 남한을 반공 보루로 만들기 위해 분단을 주도한 미국에 있다’는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은 사실일까요? 1945년 8월의 상황을 들여다보죠. 두 번째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지기 하루 전인 8월 8일, 소련은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두만강을 건너 한반도로 진격했습니다. 소련군이 어렵지 않게 한반도 전역을 장악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그 시각, 미군의 위치는 너무나 멀었습니다. 여전히 한반도에서 남쪽으로 1000㎞ 떨어진 오키나와에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은 8월 14일 소련에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한 38선 분할 점령을 제의했습니다. 두 달 전에 소련 점령 하 폴란드에서 공산정권이 수립된 것을 보고 ‘일단 소련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그들을 제거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내린 궁여지책이었습니다. 소련이 거절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스탈린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왜일까요? 홋카이도 북부에 대한 통치권을 얻어, 소련 극동함대가 태평양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할린과 홋카이도 사이 소야 해협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런 속셈이었던 겁니다.
“남한을 내주고 일본을 분할해 북일본을 갖는다!”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9월 12일부터 10월 2일까지(참 오래도 모였네…) 영국 런던에서 미국·영국·소련의 외무장관들이 참석한 런던외상회의가 열렸습니다. 그 동안 한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회의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 한국 문제가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회담의 결렬은 미국과 소련의 관계를 급격히 악화시켰고, 한국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남북 분단의 확정’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전승국 중 한 나라였던 소련은 런던외상회의에서 두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①패전국 일본의 통치에 대한 참여. ②아프리카 대륙 북단에 있는 트리폴리타니아(Triolitania)를 우리에게 할양할 것. 트리폴리타니아는 지금의 리비아 북서부를 차지하는 넓은 땅입니다. 동시에 태평양과 지중해로 진출하겠다는 야심을 공공연히 드러낸 것이죠. 미국과 영국은 이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이러자 스탈린의 입장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아직 회의가 열리던 중인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은 북한을 점령하고 있던 소련군에게 이런 결정적인 지령을 내렸습니다.
“38선 이북에 정권을 수립하라!”
이 지령이야말로 한반도의 남북 분단을 확정한 것이었습니다.
정읍발언? 대한민국 단독 정부? 분단이 이런 데서 시작되고 고착화됐다는 것은 다 웃기는 얘깁니다. 이 지령에 따라 다섯 달 뒤인 1946년 2월에 평양에서 출범한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는 김일성 독재를 고착화하고 조만식 등 민족주의 인사들을 구금했으며, 남한이 정치세력의 분립과 좌우 갈등을 겪는 동안 무상몰수 무상분배(사실은 처분권 없이 경작권만 줌)의 토지개혁, 산업시설 국유화, 지방정권기관 조직 등 단독공산정권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스탈린은 왜 그런 지령을 내렸던 걸까요?
런던외상회의에서 태평양과 지중해 진출이 좌절된 것에 대한 단순한 분풀이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미국도 소련도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관심을 지니고 있던 지역은 한반도가 아니었습니다. 만주와 중국이었습니다. 소련은 일본 통치 참여와 트리폴리타니아 점령이 좌절된 이상, 미국과 협력하지 않고 전략적 요충지인 만주를 장악하려 했습니다.
북한에 ‘정부 수립’ 지령을 내린 지 18일 뒤인 10월 8일, 스탈린은 30만 명의 중국 공산군에게 만주를 점령하라는 지령을 내렸습니다. 1946년 3월 소련군은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무기와 점령지를 중국 공산군에게 넘겨줬고, 5월 중국 공산군이 국민당군에게 패주하자 이런 조치를 취합니다.
“중국 공산군을 북한으로 후퇴시켜!”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중국 국민당군이 들어갈 수 없었던 후방기지로 북한을 제공하기 위해, 이들에게 협조적인 북한 ‘정권’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럼 당시 미국의 입장은 어땠을까요? 미국의 전략가들은 당시 한반도를 중국 대륙에 부속된 지역으로만 봤기 때문에, 한반도만을 대상으로 한 전략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1947년 4월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국공내전의 추이를 봐 가며 현상을 유지하려 한 관망(wait-and-see) 정책이 주된 기조였습니다.
1947년 9월 미국은 소련의 한반도 동시 철병 제의를 받아들여 미군 철수와 한국 문제의 유엔 이관을 결정했습니다. 허동현 교수는 “미국이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한국 문제에서 발을 빼겠다는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결과 6·25가 일어났고, 당초 한국에 별 관심이 없던 미국을 애써 다시 한반도 문제에 끌어들인 것은 1953년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성사시킨 이승만 정부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듣도보도 못했던 1945년 9월의 국제회의, 런던외상회의를 말입니다.
[後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연해주에 살던 한인 동포 17만명을 6000㎞ 떨어진 머나먼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던 사람, 그 와중에 2500명의 한인을 학살했던 사람,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단시켰던 사람, 김일성에게 지령을 내려 6.25 전쟁을 일으켰던 사람, 전쟁에 지친 김일성이 ‘인민들 다 죽게 생겼으니 제발 휴전을 허락해 달라’고 애원했는데도 ‘닥치고 전쟁 그냥 진행시켜’라며 묵살했던 사람은 모두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오시프 스탈린이었습니다. 젊은 세대가 마르크시즘에 솔깃해하던 1980년대에 한때 그조차 숭배 대상이 돼 그의 글을 담은 ‘스탈린 선집’이 대학가에서 읽혔다는 것을 생각하면 절로 한숨이 나옵니다. 저는 아직 모스크바에 가 보지 않았지만, 언젠가 크렘린 벽에 있다는 그의 무덤을 찾아가 보고 싶습니다. 당신이 그렇게도 괴롭히고 짓밟고 말살하려 했던 우리 민족은 아직도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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