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해상도의 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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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바인의 그림에 놀라고 세밀화에 감탄하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는 현실과 방불한 재현을 탐하는 본능 같은 게 있는 듯하다.
기사는 "민주열사 7명 사후 졸업"에 관한 것으로 어느 대학에서 70년대 말부터 80년대까지 "사망 제적"으로 졸업하지 못한 이들에게 졸업장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다 도서관에서 한 학생이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외치고 투신했다는 소식이 들렸다(아마 이게 도서관 시위 주동의 원형일 것이다). 이어 그가 광주 출신이라는 이야기도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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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크리틱] 정영목 |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홀바인의 그림에 놀라고 세밀화에 감탄하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는 현실과 방불한 재현을 탐하는 본능 같은 게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런 고해상도의 생생한 재현물은 우리를 압도하기는 하지만 늘 최고의 재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구멍이 숭숭 뚫린 저해상도 재현이 그 빈 구멍으로 보는 사람의 상상력을 빨아들여 더 깊은 진실을 드러내기도 한다. 가령 내 책장 옆면에는 신문에서 오려 붙여 놓은 춤꾼 이애주의 작은 흑백 저해상도 춤 사진들이 있는데, 찾아보면 천연색 고해상도 사진도 있고 동영상도 있겠지만 나는 여전히 이 사진들을 떼지 못한다. 사실 이 저해상도 사진들의 위력은 매우 강해 어지간한 마음으로는 마주보기 힘들다.
얼마 전에도 아침신문을 보다 증명사진보다 작은 저해상도 흑백사진 몇장에 홀렸다. 기사는 “민주열사 7명 사후 졸업”에 관한 것으로 어느 대학에서 70년대 말부터 80년대까지 “사망 제적”으로 졸업하지 못한 이들에게 졸업장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나도 그 어름에 학교를 다녔으니 제목에서 호명하는 이름은 대체로 들어봤고 또 그중 각별한 느낌이 드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나 혼자 이야기일 뿐, 그나마 실물을 본 사람은 고등학교 선배 하나뿐이다. 고등학교 때 학도호국단(그런 게 있었다) 연대장을 하던, 교련복이 잘 어울리는 선배로, 사열할 때 앞에서 우렁차게 구령하던 모습이 강하게 인상에 남아 있다. 그런 인상은 대학에 들어가 고등학교 동문 신입생 환영회 때까지 이어졌는데, 맥락은 기억나지 않으나 나더러 “반골 기질이 있군!” 하더니 그야말로 호탕하게 웃었다. 고등학교 후배라면 자기 서클로 끌어갈 가장 만만한 후보였을 텐데 그 후 손을 내밀지 않은 걸 보면 그 말은 나를 거둘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던 듯하다. 나 또한 당시에는 아쉬울 게 없었다.
그러다 생각이 바뀌어 선배가 아쉬워졌을 때 그가 가끔 생각났는데 그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안 건 적어도 십여년은 지난 뒤였다. 그때도 그는 나에게 여전히 연대장이었기에 전사라면 모를까 다른 죽음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이번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고 놀랐다. 이렇게 문학청년처럼 여리여리했다니! 다른 사람과 사진이 바뀐 줄 알았다(지금도 반쯤 그렇게 믿고 있다). 게다가 이제 보니, 늘 귀로만 들었기 때문에 자음접변으로 인해 그의 이름 한 자를 잘못 알고 있었다. 이제야 이름을 제대로 알게 된 선배의 졸업을 축하한다.
또 한 사람은 내가 선배의 필요성을 느낀 계기가 된 사람이다. 내 인생에 중요한 몇사람 가운데 하나라 할 이 사람도 이번에 사진으로 만나게 되었는데(처음인가?) 그 얼굴은 내 상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도저한 학자의 젊은 시절 얼굴이랄까. 그는 광주항쟁 1주년인 1981년 5월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도서관 밑에서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스크럼을 짰다 하면 바로 깨지고 잡혀가고, 그러면 또 몇시에 몇동 근처에서 다시 모인다는 연락이 내려오고 그랬을 것이다. 그러다 도서관에서 한 학생이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외치고 투신했다는 소식이 들렸다(아마 이게 도서관 시위 주동의 원형일 것이다). 이어 그가 광주 출신이라는 이야기도 들렸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던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어리바리하게 기웃거리기만 하던 나에게는 왠지 그 대목이 중요했다. 그전에 이야기도 듣고 사진도 보고 했지만 나는 공부하던 그의 낙하를 통해 광주를 처음 만났던 것 같다. 광주란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고 싶던 사람조차도 책을 던지고 도서관 창문 너머로 몸을 던지게 하는 거구나! 그날 허공을 날아 나 같은 구경꾼의 마음으로 아프게 떨어졌던 그의 졸업도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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