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사용"을 외치는 김정은의 전략 감각

한겨레 2022. 9. 15.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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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이 지난 8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14기7차 회의에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세상읽기] 김종대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지난해 10월 평양에서 열린 ‘국방발전전람회 ‘자위-2021'’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우리의 주적은 전쟁 그 자체이지 남조선이나 미국 특정한 그 어느 국가나 세력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분명코 우리는 남조선을 겨냥해 국방력을 강화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한 김 위원장은 핵무력으로 남한을 선제공격하지 않겠다는 뜻도 밝혔다. 핵무력의 목적은 ‘전쟁 승리’가 아닌 ‘전쟁 억제’라는 얘기다. 핵무기의 파괴력이 제공하는 파멸의 공포가 빚어낸 질서, 즉 냉전에서 핵무기는 존재하되 사용할 수 없는 무기였다. 냉전기에 일군의 전략가들은 “핵은 사용하지 않을 때 오히려 전략적 가치가 높아진다”며 이를 핵의 ‘그림자 정치’라고 했다. 지난해 김 위원장의 전략 감각은 냉전 이래 정설로 굳어진 억제 이론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돌연 올해 4월25일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에서 김 위원장은 “북한 핵무력의 기본사명은 전쟁을 억제함에 있지만 결코 바라지 않는 상황이 조성되는 경우에까지 핵이 전쟁 방지라는 사명에만 속박돼 있을 수는 없다”며 극적인 전환을 시사했다. “어떤 세력이든 북한의 근본이익을 침탈하려 든다면 핵무력은 다음 사명을 결단코 결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며 적극적인 핵 사용 의지를 드러냈다. 9월8일 김 위원장의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은 핵무력에 대한 지휘통제와 사용조건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핵무력정책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북한 정권 수뇌부가 공격받을 조짐만 보이거나 북한이 대규모 공격의 협박만 당해도 “핵 타격이 자동적으로 즉시에 단행된다”고 법으로 정했다.

김 위원장의 전략 변화는 왜 이뤄진 것인가. 모험적인 충동이 김 위원장을 움직였을까. 시야를 세계로 넓혀보자. 북한의 열병식이 열린 바로 그날,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러시아 국영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핵전쟁 위험은 실재하며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3월 푸틴 대통령의 핵 준비태세 발령에 이어 냉전식 억제이론의 틀에 구애받지 않고 실전에서 전술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신호였다. 이 무렵 서구의 전략가들은 미국의 10배에 달하는 2000여개 전술핵탄두를 보유한 러시아가 유럽을 위협하기 위해 자국 서부에 이를 전진배치할 의도가 있다는 관측을 내놨다. 어느새 핵은 그림자가 아닌 실존적 위협이 되었고, 핵전쟁의 문턱은 대폭 낮아졌다.

미국도 트럼프 대통령 시절 저위력 핵무기 또는 비전략적 핵무기라고 불리는 일련의 핵 개발에 착수했다. 항공기가 투하하는 핵중력폭탄, 핵순항미사일, 잠수함 발사용 단거리 핵미사일이 그것이다. 실전에서 사용될 가능성이 높은 핵무기를 보유하자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일단 개발을 멈추기는 했지만 트럼프의 핵 정책은 한국에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의 저위력 핵무기와 한국군의 3축 체계가 결합되면 북한에 대한 실효성 높은 억제력, 즉 확장억제력이 갖춰진다고 본 한국의 전략가들은 미국과 전술핵 공유, 맞춤형 억제전략으로 불리는 핵 사용 전략에 경도됐다. 4월 다카하시 스기오 일본 방위연구소 방위정책연구실장은 일본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핵은 존재하고 있으면 억지력이 된다”에서 “핵 사용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억지력이 되지 않는다”로 세계의 인식이 바뀌고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에 핵을 투하한 제1의 핵시대, 냉전시대 핵그림자로 이루어진 제2의 핵시대에 이어 이제는 핵을 사용하려는 제3의 핵시대가 임박했다는 주장이다. 최근 일본은 적기지 타격능력 확보, 미국의 전술핵 공유 등 새로운 방위정책을 모색하고 있다.

북한 정권이 이런 변화를 포착하는 전략감각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할 일이다. 북한은 국제정세가 “격변”이라며 핵에 관한 최신 동향을 기민하게 수집하며 자신의 전략을 가다듬어왔다. 일단 핵을 보유하면 사용하고 싶은 충동은 강대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러시아와 전략적 연대로 현재의 어려움을 탈출하려는 북한은 기존에 만들어 놓은 원칙을 스스로 깨면서 러시아보다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핵 전략으로 수정했다. 실제 핵전쟁을 각오해야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다는 전략의 감각이다. 전쟁에서 지느니 “지구를 폭파시켜 버리겠다”던 선대의 전쟁 유전자가 현대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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