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기자생활] 고통의 흔적들
[슬기로운 기자생활]
서혜미 | 이슈팀 기자
사회부 기자 생활을 하면 고통받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기자회견 일정부터 사건사고가 발생했을 때 현장을 챙기는 게 사회부 기자의 일이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피해 당사자나 유족의 말을 듣다 보면 떨리는 목소리, 눈가에 고이는 눈물을 통해 그가 겪는 고통을 희미하게나마 느끼곤 한다.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나 떨림에서만 고통을 감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공격적인 반응, 같은 말을 두서없이 반복하는 모습에서도 고통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태풍 힌남노가 북상하던 지난 5일, 지난달 초 수도권 집중호우로 큰 피해를 본 서울 동작구 남성사계시장 상인들을 다시 찾았을 때였다. “추석을 앞두고 비가 와서 걱정이 클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지만, 내가 취재한 상인의 절반은 “왜 물어보느냐. 당신한테 말하면 뭐가 달라지느냐”고 되물었다. 그중 유독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던 70대 상인이 풀어놓은 사연은 이랬다.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가게가 폭우로 하수구 물이 역류하며 침수됐고, 배우자는 감전 사고를 당했다. 얼굴이 보랏빛으로 변한 배우자는 숨을 쉬지 않았는데, 심폐소생술을 할 줄 모르는 자신은 주먹으로 가슴을 때리는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다행히 남편은 숨을 뱉었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119에 신고한 뒤 인근 대학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약 20분 동안 이어진 대화에서 그는 당시 긴박한 상황을 묘사하며 같은 말을 서너번씩 반복했다. 그제야 왜 상인들이 날카롭게 반응했는지 알 수 있었다. 재산상 피해만이 아니라 생명도 위협한 재해였다. 예민하게 반응했던 그의 모습은 큰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무미건조한 내 질문이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한 건 아니었는지, 취재가 일종의 가해 행위는 아니었는지 퇴근길에 곱씹어볼 수밖에 없었다.
가장 마음이 쓰인 건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들의 고통이었다. 모든 고통은 당사자에게 절대적이겠지만, 취재 현장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보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회부로 발령난 직후인 지난해 9월28일, 고 이예람 중사 유족은 특검 도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군검찰 수사심의위원회가 부실하기만 했던 초동 수사의 주요 책임자를 불기소하기로 의결한 뒤였다. 이 중사의 이름과 생전 모습을 공개하며 이날 처음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유족은 “우리 아이의 괴로웠던 마음을 도저히 묻고 갈 수가 없다. 용기를 냈다”며 “국민 여러분께서 도와주시고 관심 가져달라”고 말했다. 기자회견 중간에 군당국이 내놓은 수사 결과의 문제점을 짚다 목소리가 커진 그는 “흥분해서 죄송하다”고 말했지만, 자식의 죽음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던 모습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그 뒤로 최근까지 “서 기자님”으로 시작되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받았다. 이 중사 사건을 다룬 외신 기사, 추모제 일정, 군사법원 재판 진행 과정, 탄원서 내용 등이 담긴 메시지다. 그때마다 고민하고 또 고민해 답장을 보냈지만 그 무엇도 그의 고통을 덜어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지난 13일 공군본부 법무실장 등 8명을 추가 기소한 특검 수사 결과가 유족에게 위안이 되길 바랄 뿐이다.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가족이나 친구도 아닌 기자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애당초 당사자도 자신의 고통을 전부 말로 설명하는 게 불가능하고, 불완전한 말을 듣는 사람도 일부만을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당사자만큼 절망적이진 않겠으나 가끔은 고통의 크기에 압도당해 타인의 고통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고 느낄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영국 비평가 올리비아 랭이 <이상한 날씨>에서 쓴 “나는 목격자가 되어주는 행위가 사랑의 행위라고 생각한다”는 문장을 떠올린다. 자신의 고통을 들어주고 알아줄 사람을 찾다 찾다 처음 보는 기자 앞에 설 정도라면 그 목격자들이 늘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게 기자의 역할이 아닐까. 고통의 곁에 서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 있게끔 말이다.
h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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