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 인물 | 150지맥 완주한 박성태 선생] 우리 산의 족보를 현재에 맞게 완성한 집념의 산꾼
지난 3월 15일 충남 옥천 군북면 장계유원지에 전국각지에서 온 산꾼 100여 명이 모였다. 박성태(71) 선생의 <신산경표> 출간 10년과 그의 대간, 정맥, 기맥, 지맥 완주를 기념하기 위한 '합동 산행' 자리였다. 장령지맥 마지막 구간 7.5km를 걷는 짧은 산행이었지만 박 선생의 홈페이지에 실린 공지를 보고 전국각지에서 이를 축하하기 위해 산꾼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 모인 산꾼들은 보통 내공의 산꾼들은 아니었다. 이름과 인터넷 닉네임, 표지기명만 들어도 산꾼들 사이에선 유명인이라 할 만한 백전노장들이다. 산줄기 1만7,000km를 걸은 신경수씨, 대간을 11번 종주한 정병훈씨, '준·희' 표지기의 주인공 최남준씨, 6,454회째 산행을 하고 있는 윤상대(맨발)씨, 150지맥을 모두 완주한 서영구(죽천)씨, 100지맥을 완주한 홀대모의 조진대씨와 실버원정대로 에베레스트를 오른 이장우(장군봉)씨, J3클럽 배병만씨 등 국내 워킹산행의 최고수들이 모였다.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축하 인사를 건네며 존경의 뜻을 전했다. 골수 산꾼이면 누구나 인정한다는 박성태 선생의 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가난한 집의 장남이었다. 장남 중학교 보낼 입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3년 동안 계를 들었을 정도로 집안 살림은 팍팍했다. 명석하여 공부를 잘했지만 고등학교도 대여장학금을 받아 빚을 지고 졸업하는 마당에 대학 등록금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는 고교 졸업 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순천철도국 재경직으로 근무한다.
26세에 결혼했지만 배움에 대한 갈증이 남아 서울의 야간대학에 다니기 위해 서울로 전근신청을 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970년 국세청 시험에 합격해 서울로 상경한다. 하지만 국세청 생활은 녹록치 않았고 야근이 많아 야간대학에 다닐 여유가 없었다. 배움에 대한 갈망을 끝내 이루지 못한 것이다. 배움에 대한 한은 그의 두 아들이 대신 풀었다. 두 아들 모두 서울대를 졸업했으며, 큰아들은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둘째도 석사를 마쳤다.
1985년 그는 국세청을 그만둔다. 연금 수령을 위해 공직생활 20년을 채워 퇴직했다. 당시 42세였다. "숫자를 좋아해서 업무는 좋았지만 업무내용이 맞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국세청에는 크고 작은 비리가 만연했는데 상납은커녕 정직하게 일만 하는 대쪽 같은 성격의 그였기에 적성에 맞을 리 없었다.
이후 친구와 함께 개인 세무사무소를 차려 1999년까지 운영했다. 당시 세무사무소를 내서 큰돈을 번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의 말을 빌리면 "돈 버는 데는 재주가 없었다"고 한다. 100만 원 받을 수 있는 일이고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그는 규정대로 10만 원만 받았다. 고객관리도 융통성 있게 하질 못했다. 개인 사무소를 하면서 시간 여유가 생겨 등산을 시작했다.
인생을 바꾼 황철봉 안내산행 광고
그는 운동 차원에서 관악산과 삼성산을 다니다 국립공원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1988년 국립공원 산행을 마치고 명산을 찾아 다녔다. 운명적인 백두대간과의 만남은 1992년이었다. 신문에 난 설악산 황철봉 안내산행 광고를 보고 갔는데, 막상 가보니 백두대간 설악산 구간 종주였다. 안내산악회를 따라 남쪽으로 구간 종주를 시작해 1995년에 대간을 완주했다. 그후 호남정맥을 하려고 자료를 수집하다 조석필 선생이 쓴 <산경표를 위하여>와 <태백산맥은 없다>를 읽고 우리 산줄기 개념에 눈을 뜨게 되었다.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대원칙을 머리와 발로 이해한 그는 현대적인 산줄기표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은퇴한 1999년부터 산줄기표를 만들기 시작했다. 산줄기를 엑셀 프로그램 박스에 채워 넣는 방식으로 기록한다. 박스 안에는 산이름과 높이, 다음 산까지의 거리, 방향, 2만5,000분의 1지형도 도엽명을 적었다. 단순히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산경표>를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현대의 산 이름과 높이를 넣고 산줄기 구분 기준을 수정했다. 가령 한북정맥은 파주의 장명산이 아닌 오두산이 두 강을 가르는 산줄기의 끝이라는 것이다.
또한 산경표의 금북정맥 끝 부분을 금북기맥으로 바꾸고, 금강 북쪽을 가르는 정확한 산줄기를 호서정맥이라고 했다. 안흥진에서 끝맺는 기존의 금북정맥은 금강 북쪽에 있기는 하지만, 금강의 북쪽 울타리가 되는 산줄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해발 100m 이하의 낮은 산줄기라 해도, 못 나고 능력이 없어도 장남은 장남이듯, 정맥은 정맥이란 것이다. 그래서 금강 남쪽 산줄기에 이름 붙인 것이 금강정맥이다. 이런 작업에 대해 그는 "오류를 수정했다는 건 말이 안 되고, 현실에 맞게끔 수정했다"며 "그때 당시는 생활권에 따라서 산줄기를 구분했지만 지금은 교통의 발달로 생활권의 구분이 의미 없어져 강의 구분으로 산줄기를 분류했다"고 한다.
말처럼 작업은 쉽지 않았다. 수천 km의 산줄기에 있는 그 많은 산을 일일이 엑셀에 기록해 연결시키는 것은 무척 복잡하고 고된 일이었다. 중간에 박스 하나를 새로 추가해도 전부 다 뜯어고쳐야 할 정도로, 인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일이었다. 그의 이런 노력을 조석필 선생은 <신산경표> 발문에서 '한 톨의 쌀에 반야심경을 새기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일을 해낸 사람'이라 칭했다. 다음은 조석필 선생이 쓴 발문의 일부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육천이 넘는 지명을 추려내고, 길이와 방향을 재고…. 잠깐만요, 1부터 6천까지 숫자라도 세본 적이 있으신지요. 그것들을 한 치 오차 없이 씨와 날로 엮어, 하나씩 하나씩 네모상자에 새겨 넣는 일. 규칙을 조금만 바꿔도 모든 상자들을 다시 뜯어내 맞춰야 하는 참 미련한(이렇게 말하는 것을 용서하신다면) 작업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했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중략-
'정말로 쓸모없는 짓을 한 걸까요. 천만에요. 이 책은 관련 분야에서 교과서의 반열에 올려 마땅한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우형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책을 보지는 못하시겠지만 알려드리기는 해야겠습니다. 선생님, 생전에 바라시던 책이 나왔습니다. 나라의 산을 제대로 알려 주는 책 말입니다. 마침내요. 2004년 7월 조석필'
그는 여러 번 조석필 선생을 찾아가 산줄기표를 만드는 일에 대해 의논하고 조언을 청했다. 조석필 선생은 지도를 잘 만들 것을 당부했다. 남한의 모든 산줄기와 대표적인 산 이름을 기재한 지금껏 없었던 산자분수령에 의거한 산줄기 지도를 만든 것이다. 지도 제작을 위해선 50만 분 1 축척으로 해야 했기에 국전지보다 더 큰 용지가 필요했다. 50만 분의 1은 2cm가 1km이기에 눈에 익숙하고 그 정도 크기는 돼야 글자가 다 들어간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지도 제작비용이 너무 비쌌다.
2003년 작업을 완성하고 출간을 위해 월간 <사람과 산>을 찾아갔다. 조석필 선생의 <태백산맥은 없다>를 출판한 곳이었기에 가능할 것으로 보고 찾았으나, 자비출판을 권했다. 자비를 들여서라도 책을 만들고자 했으나 그가 가진 비용으로 지도를 만들어 주겠다는 지도사는 한 곳도 없었다. 이 와중에 월간<산>에서 책을 내겠다고 하여 '조선일보사' 이름으로 <신산경표>가 세상에 나왔다.
그는 책 제목을 '남한 산줄기표'라 했으나, 당시 월간<산> 편집장이었던 김승진 부장이 현대적인 시각으로 산경표를 계승했으니 '신산경표'라 하자고 해서 책 제목이 바뀌었다. 남한의 산줄기만 기재했는데, 책 이름이 <신산경표>라고 해서 세상에 나온 것이 그는 영 불편했다. 아무도 이를 지적하지 않았지만 그는 스스로를 속일 수 없다 하여 2010년 개정증보판 <신산경표>를 제작하며 북쪽 산줄기도 기재했다.
문헌이나 과거 지도를 통해 어렵게 정리한 것이다. 이 작업 또한 일반인의 상상을 넘는 인내력을 필요로 했다. 북한 산줄기 자료를 수소문해 <조선향토대백과>를 찾아냈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발행한 <근세 한국 5만 분의 1> 지형도와 옛날 소련군이 제작한 한반도 항공지도를 참고해 북측 산줄기를 완성했다. 이를 위해 통일부 북한지도열람실을 출근하듯 매일 찾아가 일제강점기 지형도와 지명을 모두 대조했다.
산꾼들의 도움도 있었다. 대구 산꾼이자 컴퓨터 전문가인 최인찬씨는 북한 산줄기를 재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북한 산 도상거리를 편하게 재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 전에 최인찬씨가 'e산경표'를 만들겠다고 저작권 의논을 하려 찾아왔을 때, 대포집에서 술 한 잔 사는 것으로 "어차피 산꾼들을 위해 만든 것이니 마음대로 써라"고 호의를 베푼 적이 있었다. 더불어 강 유역 면적을 측정하는 프로그램도 최씨가 만들어 주었다. 이를 위해 수십 통의 메일을 주고받았다.
박 선생은 "산줄기만 중요한 게 아니고 강줄기 유역 면적을 비교해서 수정하면서 만들었다"고 한다. 또 정맥과 기맥 아래의 산줄기를 모두 지맥으로 분류하고 30km 이상의 지맥에 대해 이름을 붙였다. 그 산줄기에 있는 가장 유명한 산의 이름 위주로 지맥이름을 붙였다. 산꾼들 사이에서는 그 이하 산줄기를 분맥, 단맥, 여맥으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박 선생은 "그렇게까지 나누면 너무 복잡해질 것 같다"고 의견을 밝힌다.
"<신산경표>가 다 팔릴지 누가 알았겠어요"
월간<산>은 <신산경표>가 팔릴 것이라 보진 않았다. '우리 산의 족보'라는 사명감으로 후세에 책을 남기기 위해 제작했으나 예상과 달리 초판과 재판, 개정증보판 모두 완판됐다. 그만큼 우리 산줄기에 대해 관심 갖는 마니아들이 많다는 것이다.
"읽을 수 있는 문장 형태의 책이 아니라 도표 형식의 표인데 이렇게 다 팔릴 줄 누가 알았겠어요. 아마 초판은 조선일보사에서 만든 책이라는 파급력이 컸어요. 초판 2,000부 찍고 추가로 1,000부 더 찍었죠. 개정증보판은 2,000부 찍자는 걸 1,500부만 찍자고 해서 그리했는데 1년도 안 돼서 다 팔렸어요. 결국 내가 운이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그는 <신산경표>가 세상에 나오는 데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세 사람을 꼽는다. 김승진 전 월간<산> 편집장과 조석필 선생, 최인찬 선생이다. 박 선생의 공로를 높이 사 대한산악연맹은 2011년 산악문화상을 그에게 수여했다. 그러나 그는 "대산련에 고마운 마음은 하나도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대한산악연맹이나 한국산악회는 해외원정과 암빙벽 등반에만 관심 있지 우리나라 산줄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제게 상을 준 것도 구색 맞추기 일뿐이에요. 받고 싶지 않았지만 월간<산>과 월간<사람과 산>에서 추천했다기에, 산악잡지를 욕 먹이고 싶지 않아 받았어요."
신산경표에 따라 1대간 7정맥 6기맥 150개 지맥을 완주했다. 책에는 147개 지맥이지만 30km가 살짝 넘는 지맥이 몇 개 더 있다는 산꾼들의 제보에 150개를 모두 완주했다. 그러나 "계산상으로 끝나는 것뿐이기에 별 감흥은 없다"고 한다.
처음부터 그가 정리한 산줄기를 다 탈 생각은 없었다. 산행 계획이 있으면 자신이 그은 산줄기를 먼저 가게 되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러면서 "<신산경표>에 오류가 없는지 직접 걸어서 확인하고, 이 산줄기를 내 발로 밟고 싶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가령 미세한 능선이 근처에 두 개가 있을 때 물길이 지나가는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다.
2010년 삼척 사금지맥을 탈 때는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등산로가 없는 산줄기의 암릉 구간을 오르다 낙석에 손가락을 맞았다. 병원에 가서 왼쪽 검지손가락 끝마디를 봉합했지만 완전치 않다. 이런 식으로 산에서 고생한 사연은 한가득이다. 그는 "산 밑에서 신세진 사람 얘기만 모아도 책 한 권은 된다"고 한다.
1만 km가 넘는 이 땅의 산줄기를 완주했지만 "체력이 약해서 남들보다 산행을 잘 못한다"고 얘기한다. 다만 "남들보다 일찍 시작해서 완주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박 선생은 '두발로 읽은 산경표'라는 홈페이지를 운영한다. 주로 산에 다녀온 후 산행기와 GPS 트랙을 올리는데, 유지가 어려워 홈페이지를 닫으려 했다. 그러나 당시 창원지검에 있던 서범정 검사가 극구 반대해서 홈페이지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검사인데도 산줄기를 그렇게 좋아해서, 산꾼들하고 배낭 메고 철조망 아래 개구멍 지나고 그랬어요. 사람이 아주 소탈해요. 홈페이지 유지비를 챙겨 준 적도 있지요. 지금은 췌장암에 걸려서…."
박 선생은 '신산경표 출간 10주년 산행'에 동참한 손님들을 위해 특별히 지도를 제작했다. 60만 분의 1 축척으로 남한 산줄기 지도를 한 장에 다 담아 완성했다. 일러스트 프로그램을 이용한 지도 제작방법을 직접 배워 스스로 만들었으며, 다만 지도가 세상에 나오기 위해선 국토지리정보원의 허가를 받아야 하기에 지도 제작 회사인 '고산자의 후예들'을 통해 발간했다. 그는 저작권을 따지지 않고 판매권을 '고산자의 후예들'에 넘겼고, 다만 "내가 구획한 산줄기 그대로 표시해달라"는 조건만 걸었다. 그는 산을 좋아하지만 수식하는 걸 싫어한다. "특별히 좋다, 어떻다 보다 사람은 자연에서 사는 게 가장 자연스럽다"며 "원래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라 말한다.
산경표를 현대에 맞게 정리하는 것은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아무도 엄두를 못 낸 일이었다. 복잡한 작업인 데다 제 아무리 지리전문가라 해도 이 방대한 작업을 혼자서 하는 것은 무리였다. 당연히 국가차원에서 해야 할 과업이지만 일본 지리학자 고토 분지로가 들여온 산맥론이 점령한 한국의 지리학계에서 '산경표'는 찬밥 신세였다.
고토 분지로는 일본 지질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동경대 교수로 20세기 초 자원수탈을 목적으로 266일 동안 말을 타고 한국의 지질을 조사했다. 이어 '조선산맥론'이란 논문을 발표했고, 지금도 교과서로 배우고 있는 태백산맥, 노령, 차령 등 이름을 짓고 개념을 만든 사람이다. 이후 고토 분지로의 한국 제자들, 즉 초창기 일본 유학파들에 의해 한국의 지리학계가 이어져 오면서, 지금도 고토 분지로가 100여 년 전 조랑말을 타고 조사한 것을 학생들이 달달 외우고 있다. 산줄기가 이어지지 않는 곳도 땅 속 광물이 같다는 이유로 산맥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산맥을 따라 종주해 보면 실제 산줄기가 이어지지 않는다.
반면 우리 고유의 지리체계인 산자분수령은 눈에 보이는 산줄기를 대간·정맥·기맥 등의 이름으로 정리한, 실제 산줄기가 이어지는 합리적인 체계다. 박성태 선생은 과거의 한자 지명으로 나열되어 있던 산줄기 표를 끈질기게 조사해 신산경표로 만들었다. 더불어 현대의 지형도에 산경표가 정확히 그어지도록 만들었다. 또 그 산줄기 1만1,000km를 모두 걸어 확인했다.
자극적인 뉴스가 난무하는 시대에 그의 성과를 주목하는 방송 매체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산줄기 10km, 아니 1km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감동적인지 아는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박, 성, 태를 신산경표를.
Copyright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