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 식료품 받으러 아침도 걸렀다"..살인물가 덮친 실리콘밸리

실리콘밸리=정혜진 특파원 2022. 9. 1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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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음료로 옮겨붙은 美 인플레
식재료가격 1년새 13.5% 급등
실리콘밸리 4명 중 1명이 '빈곤'
최대 푸드뱅크 세컨드하비스트
인플레에 식료품 종류 줄였지만
배급 2~3시간 전부터 대기 행렬
렉서스 등 고가차량도 눈에 띄어
13일(현지 시간) 오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의 한 대학 주차장에서 세컨드하비스트 봉사자들이 대기 차량에 식료품을 싣고 있다. 실리콘밸리=정혜진 특파원
[서울경제]
13일(현지 시간) 오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의 한 대학 주차장에서 식료품 배급을 기다리는 차량이 트렁크를 열고 기다리고 있다. 실리콘밸리=정혜진 특파원

13일(현지 시간) 오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에 위치한 엔비디아 신축 사옥에서 차로 3분 남짓 떨어진 한 대학의 주차장. 100여 대에 달하는 차량이 주차 요원들의 안내를 받아 빼곡하게 행렬을 이루며 늘어서 있다. 5분도 되지 않아 11~12대의 차들이 한 열을 채우고 나면 그 옆으로 새로운 줄이 생겨난다. 차들이 향하는 공터 한구석에는 크기가 다른 종이 박스들이 높이 쌓아 올려져 있다.

오전 9시 반이 되자 주황색 조끼를 입은 봉사자의 손 신호에 앞줄부터 차들이 박스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3인 1조로 구성된 봉사자들이 드라이브 스루 방식으로 두세 종류의 박스를 차량 트렁크에 싣고는 문을 닫으며 운전자에게 인사를 건넨다. “행운을 빌어요(Good luck).”

13일(현지 시간) 오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의 한 대학 주차장 앞에 세컨드하비스트의 푸드 뱅크 팻말이 서 있다. 실리콘밸리=정혜진 특파원
13일(현지 시간) 오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의 한 대학 주차장에서 식료품 배급 한 시간 전부터 대기 차량이 줄을 이루고 있다. 실리콘밸리=정혜진 특파원

실리콘밸리 지역의 최대 푸드 뱅크 단체인 세컨드하비스트실리콘밸리가 매주 화요일 샌타클래라 인근 주민들을 대상으로 닭, 유제품, 쌀과 채소류 등 식료품을 나눠주는 현장의 풍경이다. 물가가 비싼 실리콘밸리 지역의 주민들이 건강한 음식을 섭취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취지에서 활동하는 단체로 별도의 소득 기준 없이 누구에게나 식료품을 나눠준다.

이 단체의 식료품 배급을 찾는 행렬이 최근 들어 눈에 띄게 늘어났다. 8%대의 고물가에 시달리는 미국에서도 살인적 물가로 이미 악명 높은 실리콘밸리 지역은 인플레이션의 타격이 유독 큰 지역이다. 샌프란시스코 이남 실리콘밸리 지역에 해당하는 샌타클래라 카운티 및 샌머테이오 카운티의 900여 곳에서 주기적으로 열리는 푸드 뱅크에는 급격하게 늘어난 생활비 부담을 덜기 위해 식료품 배급을 받으러 오는 주민들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차량 행렬 중에는 렉서스 등 고급 차 브랜드도 눈에 띄었다.

지난해부터 행사에 참가해 온 한 봉사자는 “원래 오전 10시부터 12시 사이에 식료품 배급을 하는데 8시 전부터 대기 행렬이 생기기 시작해 몇 주 전부터는 배급 시간을 30분 앞당겼다”며 “두세 달 전부터 대기가 크게 늘기 시작해 식량을 더 많이 준비하는데도 금방 동이 난다”고 전했다. 식료품을 받기 위해 아침을 거르고 차 안에서 에너지 바, 바나나 등으로 허기를 달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차 안에서 아침을 먹으며 대기 중이던 유네스는 “석 달 전만 해도 코스트코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으려고 줄을 섰는데 이제는 푸드 뱅크에서 줄 서는 것이 매주 중요한 일과가 됐다”며 “최근 살던 임대주택을 재계약하면서 렌트비가 300달러 넘게 올랐고 아이 어린이집 비용도 300달러가 올랐다. 외식을 줄여도 식재료 값이 올라 두 아이의 끼니를 챙기기도 버겁다”고 토로했다. 그는 “하다못해 아이 이발 비용까지 올라서 집에서 머리카락을 잘라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의 가족이 처한 상황은 이 지역 가구들의 일반적인 모습이 돼가고 있다. 지역 내 또 다른 구호단체인 유나이티드웨이베이에어리어는 올 6월에 낸 보고서에서 “지역 주민 4명 중 1명이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며 빈곤화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 실리콘밸리 지역에서 식료품을 공급하는 세컨드하비스트 차량. 실리콘밸리=정혜진 특파원

미국의 8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기름 값만 제외한 모든 가격이 줄줄이 오른 미국 내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매달 고정적으로 나가는 월세·교육비·보험료 등이 모두 올랐으니 결국 식료품을 줄일 수밖에 없는데 식품 물가는 전달 대비 0.8%나 올랐다. 특히 식재료 값의 경우 전월 대비 0.7%, 1년 전과 비교하면 13.5%가 늘었다. 팁을 내야 하는 외식비는 전년 동월 대비 9% 올랐다. 높은 외식비를 줄이려면 집밥 비중을 늘려야 하는데 식재료 값도 크게 뛰고 있으니 식비 절약을 위해 푸드 뱅크로 인파가 몰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 셈이다. 중국계 미국인으로 실리콘밸리에 7년째 거주 중인 스텔라 리우는 “양파·당근·우유·계란·닭고기 등 정말 기본적인 식재료를 나눠주지만 이것만 아껴도 큰 도움이 된다”며 “그나마 저렴한 코스트코에서 장을 봐도 육류를 넣으면 300달러가 훌쩍 넘는데 조금이라도 부담을 줄일 수 있다면 몇 시간을 기다리더라도 오게 된다”고 말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한 마트에 10달러(약 1만 4000원)에 육박하는 베이컨이 즐비하게 놓여 있다. 실리콘밸리=정혜진 특파원
세컨드하비스트실리콘밸리에서 나눠준 공지문에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식료품 구성에 변화가 있다고 안내돼 있다. 실리콘밸리=정혜진 특파원

하지만 이 단체 또한 미 전역을 휩쓴 인플레이션의 타격을 피하지는 못했다. 최소한의 영양 섭취를 위해 나눠주는 계란·우유·빵·닭고기 등의 가격 상승률이 더욱 가파르기 때문이다. 특히 주기적으로 섭취하는 우유와 빵의 가격이 전월 대비 무려 1.2%의 상승률을 보이면서 사람들이 기다리던 빵은 배급 품목에서 사라졌다.

이날 세컨드하비스트 봉사자들이 현장에서 대기자들에게 나눠준 공지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높아진 식재료 가격에 적응하는 동시에 더 많은 이들에게 식량을 나눠주기 위해 식료품 구성과 양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리콘밸리=정혜진 특파원 made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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