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억' 실패→'오징어게임' 성공, '김훈 딸' 김지연의 뚝심[곽명동의 씨네톡]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소설 ‘칼의 노래’ ‘남한산성’ ‘하얼빈’으로 유명한 김훈 작가는 2005년 씨네21과 인터뷰에서 딸 김지연 싸이런 픽쳐스 대표의 일화를 들려준 적이 있다. “딸아이가 영화 찍는다고 해서, 돈을 1000만원을 줬거든. 10분짜리 만드는데 그렇게 든대. 현장에 오라고 해서 가봤더니 한 놈이 막대기에 걸레 같은 걸 달아서 들고 있더라고. 그게 마이크래. 그놈이 만든 영화를 봤어. 제목이 ‘일상에 대한 구토’야. 거기 나오는 아빠가 일상에 매몰돼가지고 머리맡에 담배꽁초가 가득한 재떨이가 있고 관념과 추상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야. 나중에 자막에 ‘아버지 고맙습니다’라고 뜨더라고. 돈 받아다가 지들끼리 논 거야. 신바람이 나니까.”
“신바람이 나서 지들끼리 논” 결과가 쌓이고 쌓여서 ‘오징어게임’의 세계적 열풍으로 나타났다. 김훈 작가의 눈에는 마뜩지 않아 보였겠지만, 아마추어 시절 김지연 대표의 도전정신은 훗날 세계 대중문화계의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전 세계는 ‘오징어게임’ 열풍에 빠졌고, 프랑스 철학자는 심오한 분석을 담은 책까지 출간했다. 미국 LA는 ‘오징어게임의 날’을 제정했고, 최고 권위의 에미상은 감독상(황동혁), 남우주연상(이정재)를 비롯해 6관왕을 선사하며 경의를 표했다. 황동혁 감독은 수상소감에서 ‘오징어게임’에 문을 열어준 넷플릭스에 감사를 전했다. 그러나 그 문을 연 것은 김지연 대표의 뚝심이다.
그는 서강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신문방송을 전공하다 영화로 방향을 틀었다. 싸이더스 픽쳐스에서 경험을 쌓은 김 대표는 ‘이든픽쳐스’를 설립해 첫 작품으로 영화 ‘10억’(2009)을 만들었다. 방송국에서 주최한 서바이벌 생존 게임에서 우승자 단 1명만이 상금 10억원을 가지고 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사막과 밀림을 배경으로 마지막 한 명이 살아 남을 때까지 멈출 수 없었던 미스터리 게임쇼인데, 여기서도 ‘뗏목게임’ ‘보물찾기’ ‘러시안룰렛’ 등의 게임이 등장한다. 이 영화는 44만명을 끌어모으는데 그치고 흥행에 실패했다. 그러나 이 좌절은 10여년 뒤, ‘오징어게임’ 성공의 자양분이 됐다.
김 대표가 제작한 영화의 공통 키워드는 ‘생존’이다. 데뷔작 ‘10억’의 끝까지 살아남는 이야기는 ‘오징어게임’과 연결된다. 아동 성폭력 문제를 다룬 ‘도희야’에선 아이의 생존을 담아냈다. ‘남영동 1985’는 군사정권의 모진 고문 속에서 살아남은 민주화 투사의 이야기가 아닌가. 아버지 김훈 작가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남한산성’은 청나라의 침입에 조선의 명운을 구해내기 위한 처절한 사투를 다룬 영화다. 그러니까, 김 대표는 절박한 상황에서 반드시 살아남아야하는 사람의 이야기에 끌린다. 특히 ‘오징어게임’은 무한경쟁 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로 세계를 사로 잡았다.
황동혁 감독은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 이후 통장 잔고에 1만원밖에 없던 시절에 ‘오징어게임’의 시나리오를 썼다. 낯설고 허황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그렇게 먼지만 쌓여가던 시나리오는 김 대표를 만나 새로운 동력을 얻었다. ‘10억’으로 실패했던 김 대표는 코인열풍이 불었던 사회 분위기를 간파하고 이제는 서바이벌 게임이 성공할 수 있겠다는 감을 잡았다. 두 사람 모두 밑바닥에서 시작해 세계 최고로 올라섰다. 그들은 꼭 해야만하는 이야기를, 대중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방식으로, 그것도 자본주의를 오락적으로 비판하는 방법으로 펼쳐냈다.
황 감독과 김 대표의 성향을 감안하면, ‘오징어게임 시즌2’도 더 세련된 이야기의 생존이 화두가 될 것이다.
[사진 = 넷플릭스, 이든픽쳐스, AFP/BB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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