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제국의 영광과 오욕 안고 떠나는 여왕의 마지막 여행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70년 214 일간 재위 했다.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재위 한 국왕이라고 한다. 장례식 앞에 '세기적' 이란 말을 붙여야 할지 망설여진다. 인류 역사에서 큰 인물의 퇴장인 것은 분명하다. 한때 제국주의를 대표했던 영국 여왕으로 1, 2차 세계 대전은 물론, 냉전의 시작과 붕괴, 그라고 아편 전쟁으로 중국을 몰아붙여 할양 받은 홍콩을 다시 양도하는 역사를 지켜봤던, 말 그대로 산전수전의 '세기적 여왕'이라 할 수 있다. 역대 왕들도 그렇겠지만 그는 20세기와 21세기라는 역사의 부침을 온 몸으로 마주했었다. 살았을 때는 시간이 사람을 떠 메고 가는 것 같지만 죽음의 때엔 결국 사람이 시간을 떠 메고 간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여왕의 역사는 영광과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 공존했다. 영국 정부는 국왕의 사망에 대비해 시대적 의미를 담은 코드를 준비하고 작동 시켜 왔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2세에게는 '런던 브리지가 무너졌다"는 암호가 채택됐다. 대영제국 70년의 영고성쇠를 지켜 본 여왕에게 적격의 암호라고 그를 추모하든, 하지 않든 많은 사람들은 동의할 것이다. 특히 영국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다리가 끊긴 것과 같은 슬픔이 존재할 것이다.
여왕은 재위 기간 현직 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최대한 자제했다. 하지만 중요한 순간에 적절한 선에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다. 대처 전 총리가 1982년 아르헨티나와 포틀랜드 전쟁을 선포할 당시엔 국왕의 승인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앤드루 왕자가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는데 부모로서 매우 걱정스럽다"며 무엇보다 신속한 전쟁 종결을 주문했다고 한다. 여왕은 말년에는 오랜 세월 영국과 분쟁을 겪었던 북아일랜드를 직접 방문했고 화해의 제스처를 내밀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 때는 안동에서 "한국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고 싶다"며 중효당 마루에 맨발로 올랐던 여왕의 소탈함이 기억에 선명하다.
언론들은 여왕이 런던의 버킹검 궁이 아닌 스코틀랜드 밸모럴 성을 마지막 영생지로 선택한 것도 통합 메시지를 남긴 것이라고 해석한다. 지금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불편한 관계에 있다. 스코틀랜드에선 2014년 독립 투표가 실시됐다가 부결됐고, 내년에 재추진할 계획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여왕의 서거 행보는 마지막까지 '통치의 본질'을 깨닫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역사적 근원을 따지자면 여왕의 개인 탓이라 할 수 없으나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아일랜드의 백인 인디언들' 취급을 긴 세월 받았다. 인구 거의 절반이 크롬웰의 병사들에 의해 살해 되었고, 그뒤에는 수 천 명의 남자와 여자들이 백인 노예가 되어 서인도 제도로 보내졌다. 또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대기근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다. 20세기 와서는 북아일랜드에서 영국 지지를 받는 신교파와 독립을 요구하는 구교도 간 끊임없는 분쟁으로 양측이 끔찍한 아픔을 겪어야 했다.
아일랜드 출신 대문호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 사람들>에서 식민 통치로 불행했던 조국, 더블린 시민들의 답답하고 불편한, 마비된 일상을 담담하게 그렸다. 문학적으로 '에피퍼니'라고 얘기 되는데 우리말로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해당한다. 흔한 말로 요즘 '현타가 온다'는 뜻 정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궁핍과 행복이라고는 단 한 조각도 보이지 않는 불행한 가정에 있는 젊은 여인이 남자친구로부터 아르헨티나로 떠나자는 제안을 받지만 불행한 현실에서 벗어날 용기가 없는 현실, 런던 도회지로 나간 성공한 친구의 멋진 생활을 동경하지만 도달하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하고 갓난아이에게 짜증을 퍼붓는 아빠, 예배에 참석했지만 전혀 영적이지 않고 세속적인 대화만 나누는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들은 음울하고 암울한 당시 아일랜드의 현실을 묘사한다. 주인공들은 그들의 속박 된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매번 드러내지만, 결국 마지막에선 '존재하는 현실' 앞에서 체념하고 주저 앉는다. '헛된(?) 꿈'을 꾸는 듯 하다가 자기가 처한 현실을 문득 깨닫고 무너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수 백 년 간 형성된 아일랜드 인의 식민지 근성을 일깨우려 조이스가 비판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제국 역사에서 남겨진 유산이 어디 아일랜드 뿐이겠는가.
영국 여왕 영면을 위한 마지막 여정을 지켜보면 전 지구적으로 추모와 식민지 냉소가 공존하는 것 같다. 영국 현지 소식은 조문객들이 여왕에게 마지막 조의를 표하기 위해 몇 날 밤을 세워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고 전한다. 또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해 세계의 주요 지도자가 마지막 영결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영국 정부가 가급적 전용기를 이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권고를 했을 정도라 한다.
그러나 아일랜드와 아프리카, 자메이카 등 과거 식민지였던 국가에서는 여왕의 서거를 두고 복잡하고 미묘한 반응들이 표출되고 있다. 제국주의 시대의 영광과 오욕의 산물을 엘리자베스 여왕 2세가 모두 안고 먼 여행지로 떠나가는 느낌이다. 존 밀턴은 <실낙원>에서 이 세상의 들판에서는 선과 악이 거의 불가분의 관계로 함께 자란다고 했다. 조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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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구용회 논설위원 goodwill@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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