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창원 LG 전력분석원, 강병현이 살아갈 제2의 인생
손동환 2022. 9. 15. 09:46
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2022년 8월호에 게재됐다. 인터뷰는 7월 15일 저녁에 이뤄졌다.(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대한민국 남자농구를 짊어질 유망주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강병현이었다. 어렵지 않게 프로에 입성했던 강병현은 데뷔 시즌부터 잠재력과 발전 가능성을 보여줬다. 데뷔 세 번째 시즌에는 우승을 결정짓기도 했다.
시련도 있었다. 하지만 그 시련이 강병현의 인생에 큰 깨달음을 줬다. 깨달음을 경험으로 치환한 강병현은 2021~2022 시즌 종료 후 농구공을 놓았다. 대신 컴퓨터와 수첩, 카메라 등을 잡고 있다. ‘창원 LG 전력분석원’이라는 새로운 직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남자농구를 짊어질 유망주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강병현이었다. 어렵지 않게 프로에 입성했던 강병현은 데뷔 시즌부터 잠재력과 발전 가능성을 보여줬다. 데뷔 세 번째 시즌에는 우승을 결정짓기도 했다.
시련도 있었다. 하지만 그 시련이 강병현의 인생에 큰 깨달음을 줬다. 깨달음을 경험으로 치환한 강병현은 2021~2022 시즌 종료 후 농구공을 놓았다. 대신 컴퓨터와 수첩, 카메라 등을 잡고 있다. ‘창원 LG 전력분석원’이라는 새로운 직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장신 가드
대한민국 농구는 늘 장신 볼 핸들러를 열망했다. 기사를 쓰고 있는 지금은 195cm 이상의 볼 핸들러가 많아졌지만, 2000년대 후반이나 2010년대 초반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중앙대 시절의 강병현은 흔치 않은 장신 볼 핸들러였다. 거기에 해결사 본능도 갖췄다. 그래서 프로 입성 후에도 많은 기대를 받았다. 그 기대를 2008~2009 시즌과 2010~2011 시즌에 충족했다. 언급된 두 시즌 모두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2013~2014 시즌 종료 후 안양 KGC인삼공사로 트레이드됐다. 하지만 KGC인삼공사에서도 자기 몫을 다했다. 아니, KGC인삼공사에서도 중심 자원을 맡았다. 대한민국 남자농구에 큰 힘을 실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강병현은 “메인 볼 핸들러를 맡았다면, 잘하는 선수로 평가받지 못했을 거다”며 다른 의견을 보였다.
프로 입단 초기만 해도, 대표팀도 이끌 자원으로 꼽혔습니다.
컨디션과 운동 능력은 좋았습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돌아보면, 팀의 1옵션은 아니었습니다. 외국 선수를 제외해도, 3~4번째 옵션이었다고 생각해요. 추승균 전 감독님(현 SPOTV 해설위원)과 (전)태풍이형, (하)승진이 등이 메인이었고, 저는 중심 자원에게서 나오는 볼을 많이 활용했던 것 같아요. 대표팀에서도 그랬고요.
물론, 제 농구에는 자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팀의 메인 옵션으로 꼽히기에는 약했다고 생각해요. ‘내가 만약 팀의 메인 볼 핸들러를 맡았다면, 과거와 현재의 에이스 자원처럼 활약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어요.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늘 발전하는 선수였습니다. 특히, 군 제대 직후의 경기력은 군 입대 전의 경기력보다 나아보였고요.
입대 전만 해도, 슈팅 자신감이 부족했어요. 간혹 3점을 쏘기는 했지만, 돌파의 비중이 더 높았죠. 그렇지만 입대 후 개인 시간이 늘어났고, (정)영삼이형을 포함한 군대 동기들과 개인 연습을 많이 했어요.
영삼이형은 미드-레인지를 많이 연습했고, 저는 3점을 많이 던졌습니다. 3점 라인 두 발 뒤에서도 연습했어요. 그렇게 연습하다 보니, 제대 후 첫 시즌에 슛을 많이 던질 수 있었어요.
(입대 전 마지막 시즌인 2010~2011 정규리그에는 경기당 4.1개의 3점을 던졌고, 제대 후 첫 시즌은 2012~2013 정규리그에는 경기당 6.2개의 3점을 시도했다)
던지면서 슛의 중요성을 더 알게 됐고, 더 자신 있게 던졌던 것 같아요. 그게 입대 전과 가장 큰 차이점인 것 같아요.
2013~2014 시즌 종료 후 KGC인삼공사로 트레이드됐습니다. 하지만 환경의 변화에도 자기 역량을 보여줬습니다.
(KGC인삼공사 소속이었던 김태술이 계약 기간 5년에 2014~2015 보수 총액 6억 2천만 원의 조건으로 KGC인삼공사와 사인한 후 KCC로 트레이드됐다. 일명 사인 앤 트레이드. 그 후 KCC에 있던 강병현과 장민국이 KGC인삼공사로 트레이드됐다)
KCC에 있을 때만 해도, 거의 30분 넘게 뛰었습니다. 그렇지만 2015~2016 시즌에는 출전 시간이 줄었어요.(경기당 24분 37초를 소화했다) 코트와 벤치를 오가는 일도 많았죠. 물론, 코트를 나갔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은 있었지만, 더 뛰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하지만 그건 감독님과 코치님께서 결정하시는 문제고, 저는 ‘출전 시간만큼은 열심히 뛰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KGC인삼공사 시절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기존 선수들 덕분에 잘 적응했던 것 같아요. 다만, ‘욕심을 조금 더 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은 들어요.(웃음)
대한민국 농구는 늘 장신 볼 핸들러를 열망했다. 기사를 쓰고 있는 지금은 195cm 이상의 볼 핸들러가 많아졌지만, 2000년대 후반이나 2010년대 초반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중앙대 시절의 강병현은 흔치 않은 장신 볼 핸들러였다. 거기에 해결사 본능도 갖췄다. 그래서 프로 입성 후에도 많은 기대를 받았다. 그 기대를 2008~2009 시즌과 2010~2011 시즌에 충족했다. 언급된 두 시즌 모두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2013~2014 시즌 종료 후 안양 KGC인삼공사로 트레이드됐다. 하지만 KGC인삼공사에서도 자기 몫을 다했다. 아니, KGC인삼공사에서도 중심 자원을 맡았다. 대한민국 남자농구에 큰 힘을 실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강병현은 “메인 볼 핸들러를 맡았다면, 잘하는 선수로 평가받지 못했을 거다”며 다른 의견을 보였다.
프로 입단 초기만 해도, 대표팀도 이끌 자원으로 꼽혔습니다.
컨디션과 운동 능력은 좋았습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돌아보면, 팀의 1옵션은 아니었습니다. 외국 선수를 제외해도, 3~4번째 옵션이었다고 생각해요. 추승균 전 감독님(현 SPOTV 해설위원)과 (전)태풍이형, (하)승진이 등이 메인이었고, 저는 중심 자원에게서 나오는 볼을 많이 활용했던 것 같아요. 대표팀에서도 그랬고요.
물론, 제 농구에는 자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팀의 메인 옵션으로 꼽히기에는 약했다고 생각해요. ‘내가 만약 팀의 메인 볼 핸들러를 맡았다면, 과거와 현재의 에이스 자원처럼 활약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어요.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늘 발전하는 선수였습니다. 특히, 군 제대 직후의 경기력은 군 입대 전의 경기력보다 나아보였고요.
입대 전만 해도, 슈팅 자신감이 부족했어요. 간혹 3점을 쏘기는 했지만, 돌파의 비중이 더 높았죠. 그렇지만 입대 후 개인 시간이 늘어났고, (정)영삼이형을 포함한 군대 동기들과 개인 연습을 많이 했어요.
영삼이형은 미드-레인지를 많이 연습했고, 저는 3점을 많이 던졌습니다. 3점 라인 두 발 뒤에서도 연습했어요. 그렇게 연습하다 보니, 제대 후 첫 시즌에 슛을 많이 던질 수 있었어요.
(입대 전 마지막 시즌인 2010~2011 정규리그에는 경기당 4.1개의 3점을 던졌고, 제대 후 첫 시즌은 2012~2013 정규리그에는 경기당 6.2개의 3점을 시도했다)
던지면서 슛의 중요성을 더 알게 됐고, 더 자신 있게 던졌던 것 같아요. 그게 입대 전과 가장 큰 차이점인 것 같아요.
2013~2014 시즌 종료 후 KGC인삼공사로 트레이드됐습니다. 하지만 환경의 변화에도 자기 역량을 보여줬습니다.
(KGC인삼공사 소속이었던 김태술이 계약 기간 5년에 2014~2015 보수 총액 6억 2천만 원의 조건으로 KGC인삼공사와 사인한 후 KCC로 트레이드됐다. 일명 사인 앤 트레이드. 그 후 KCC에 있던 강병현과 장민국이 KGC인삼공사로 트레이드됐다)
KCC에 있을 때만 해도, 거의 30분 넘게 뛰었습니다. 그렇지만 2015~2016 시즌에는 출전 시간이 줄었어요.(경기당 24분 37초를 소화했다) 코트와 벤치를 오가는 일도 많았죠. 물론, 코트를 나갔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은 있었지만, 더 뛰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하지만 그건 감독님과 코치님께서 결정하시는 문제고, 저는 ‘출전 시간만큼은 열심히 뛰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KGC인삼공사 시절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기존 선수들 덕분에 잘 적응했던 것 같아요. 다만, ‘욕심을 조금 더 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은 들어요.(웃음)
아킬레스가 된 아킬레스건 파열
강병현은 새로운 팀에서도 자기 입지를 굳혔다. 새로운 팀에 완벽히 녹아들었다. 당시 팀을 이끌고 있던 김승기 KGC인삼공사 감독(현 데이원 감독)의 기대도 컸다.
하지만 강병현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강병현은 2016년 2월 8일 원주 동부와의 경기에서 왼쪽 발목을 잡고 쓰러졌다. 순간 큰 부상임을 직감했다. 실제로 큰 부상이었다. 왼쪽 아킬레스건 파열. 최소 1년을 날려야 하는 부상이었다.
2016~2017 시즌 복귀해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예전의 강병현이 아니었다. 아킬레스건 파열이 강병현의 아킬레스건이 됐다. 무엇보다 달라진 팬심이 강병현과 주변 사람을 아프게 하기도 했다.
2016년 2월 8일, 왼쪽 아킬레스건이 파열됐습니다.
다쳤을 때부터 심각하다고 느꼈습니다. 근육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해본 적이 있지만, 그것과는 너무 달랐어요. 이상했죠. 저 스스로 아킬레스건을 다친 것 같다고 생각했고, 병원에서도 “아킬레스건이 끊어졌다”고 진단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져 내렸어요. 저도 가족들도 주위 사람들도 많이 힘든 시간이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소중한 경험이었어요. 아킬레스건을 다치지 않았더라면, 벤치 멤버의 마음을 평생 헤아리지 못했을 거예요. 아킬레스건을 다친 후, 백업 자원들의 어려움을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었죠. ‘벤치에 있는 선수들이 정말 어려운 길을 걸었구나’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1년 동안 재활에만 매진했음에도, 이전의 폼을 찾지 못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이제는 원래 능력의 80% 밖에 내지 못할 거다”고 하셨고, 저도 큰 부상 후 소극적으로 변했습니다. 원래 돌파를 즐겨했지만, 트라우마 때문에 돌파를 못했거든요. 그런 트라우마를 타파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수술을 또 하면 끝이라는 생각이 가장 컸어요.
많이 답답했을 거 같습니다.
그 때만 해도, 인터넷 기사에서 댓글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댓글은 ‘1’도 없었어요.(웃음) ‘은퇴’와 ‘퇴물’, ‘끝’은 기본이고, 입에 담지 못할 이야기들이 댓글로 달렸어요. 댓글에 신경을 쓰는 타입이 아닌데도, 그런 댓글을 보는 게 쉽지 않았어요. ‘조금은 응원을 해주시지...’라는 생각도 들었고요.(웃음)
강병현은 새로운 팀에서도 자기 입지를 굳혔다. 새로운 팀에 완벽히 녹아들었다. 당시 팀을 이끌고 있던 김승기 KGC인삼공사 감독(현 데이원 감독)의 기대도 컸다.
하지만 강병현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강병현은 2016년 2월 8일 원주 동부와의 경기에서 왼쪽 발목을 잡고 쓰러졌다. 순간 큰 부상임을 직감했다. 실제로 큰 부상이었다. 왼쪽 아킬레스건 파열. 최소 1년을 날려야 하는 부상이었다.
2016~2017 시즌 복귀해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예전의 강병현이 아니었다. 아킬레스건 파열이 강병현의 아킬레스건이 됐다. 무엇보다 달라진 팬심이 강병현과 주변 사람을 아프게 하기도 했다.
2016년 2월 8일, 왼쪽 아킬레스건이 파열됐습니다.
다쳤을 때부터 심각하다고 느꼈습니다. 근육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해본 적이 있지만, 그것과는 너무 달랐어요. 이상했죠. 저 스스로 아킬레스건을 다친 것 같다고 생각했고, 병원에서도 “아킬레스건이 끊어졌다”고 진단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져 내렸어요. 저도 가족들도 주위 사람들도 많이 힘든 시간이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소중한 경험이었어요. 아킬레스건을 다치지 않았더라면, 벤치 멤버의 마음을 평생 헤아리지 못했을 거예요. 아킬레스건을 다친 후, 백업 자원들의 어려움을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었죠. ‘벤치에 있는 선수들이 정말 어려운 길을 걸었구나’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1년 동안 재활에만 매진했음에도, 이전의 폼을 찾지 못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이제는 원래 능력의 80% 밖에 내지 못할 거다”고 하셨고, 저도 큰 부상 후 소극적으로 변했습니다. 원래 돌파를 즐겨했지만, 트라우마 때문에 돌파를 못했거든요. 그런 트라우마를 타파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수술을 또 하면 끝이라는 생각이 가장 컸어요.
많이 답답했을 거 같습니다.
그 때만 해도, 인터넷 기사에서 댓글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댓글은 ‘1’도 없었어요.(웃음) ‘은퇴’와 ‘퇴물’, ‘끝’은 기본이고, 입에 담지 못할 이야기들이 댓글로 달렸어요. 댓글에 신경을 쓰는 타입이 아닌데도, 그런 댓글을 보는 게 쉽지 않았어요. ‘조금은 응원을 해주시지...’라는 생각도 들었고요.(웃음)
종착역, 그리고...
강병현은 2017~2018 시즌 종료 후 또 한 번 트레이드됐다. 이원대(현 대구 한국가스공사)와 함께 창원 LG로 이적했다.
예전만큼 화려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그렇지만 살아남는 법을 알았다. 수비와 리바운드, 루즈 볼 싸움과 슈팅 등 팀을 위한 플레이를 했다. 볼 하나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선수가 됐다.
플레이 스타일을 바꾼 강병현은 LG에 꼭 필요한 선수가 됐다. 이적 첫 시즌부터 4강 플레이오프 진출을 견인했다. 그러나 나이와 부상 후유증 때문에, 플레이 스타일의 변화도 한계를 보였다. 2021~2022 시즌 종료 후 정든 유니폼을 벗었다. 그리고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2017~2018 시즌 종료 후 창원 LG로 트레이드됐습니다. 이적한 첫 시즌부터 팀을 4강 플레이오프로 이끌었는데요.
(LG는 2014~2015 시즌 이후 4년 만에 4강 플레이오프로 향했다. 그리고 2019~2020 시즌부터 2021~2022 시즌까지 3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득점을 얼마나 하느냐보다, 팀 플레이를 먼저 떠올렸습니다. 팀에 필요한 수비와 리바운드, 팀원들을 위한 어시스트와 팀 분위기를 위한 슈팅 정도만 생각했습니다. 이적 첫 시즌에는 결과가 좋았고,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팀 플레이만큼은 아직 괜찮네’라는 생각도 했고요.
그렇지만 폼이 점점 떨어졌습니다. ‘은퇴’라는 단어가 더 크게 다가왔을 것 같습니다.
은퇴를 생각한 결정적인 시기는 2021~2022 시즌이었습니다. 여기까지라는 생각을 했고, 와이프한테도 살짝 이야기했습니다.
‘1년 정도 더 해볼까?’라는 아쉬움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1년 더 한다고 해서, 제 농구 인생에 반전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선수 인생과 농구로 쌓은 커리어에도 미련이 없었고요.
2022년 5월 은퇴를 결정했습니다. 은퇴 후 곧바로 전력분석원 제의를 받았는데요.
감사하면서도 두려움이 컸습니다.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 동안 농구만 했지, 다른 걸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처음 출근할 때도 어색했습니다. 저를 보는 사람도 저도 어색했죠.(웃음)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지금도 하나씩 배우고 있고, 하나씩 적응하는 단계입니다.
선수 때도 창원에서 출퇴근을 했고, 전력분석원이 된 후에도 출퇴근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선수 때는 운동만 하면 됐습니다. 하지만 전력분석원은 여러 자료와 영상들을 체크해야 합니다. 감독님과 코치님께 제출할 자료도 만들어야 해요.
하지만 감독님과 코치님께서 배려해주신 게 있습니다. 선수들이 코트에서 운동할 때, 저도 참관하게 해주신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야간에 김동우 코치님과 함께 어린 선수들의 운동을 봐주고 있습니다. 하루가 정말 바쁘게 지나가는 것 같아요.(웃음)
전력분석원이 아닌 다른 길도 생각하셨을 것 같아요.
사실 저도 지도자의 꿈을 갖고 있습니다. 코치로 가면 제일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렇지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잖아요. 자리가 있어야 하고, 타이밍도 맞아야 하고요.
“방송을 해보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저에게는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관심도 없었고요. 어쨌든 제2의 인생을 농구 쪽으로 잡고 싶었고, 프로농구 쪽에 있고 싶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전력분석부터 차근차근 배우는 게 저한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강병현은 2017~2018 시즌 종료 후 또 한 번 트레이드됐다. 이원대(현 대구 한국가스공사)와 함께 창원 LG로 이적했다.
예전만큼 화려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그렇지만 살아남는 법을 알았다. 수비와 리바운드, 루즈 볼 싸움과 슈팅 등 팀을 위한 플레이를 했다. 볼 하나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선수가 됐다.
플레이 스타일을 바꾼 강병현은 LG에 꼭 필요한 선수가 됐다. 이적 첫 시즌부터 4강 플레이오프 진출을 견인했다. 그러나 나이와 부상 후유증 때문에, 플레이 스타일의 변화도 한계를 보였다. 2021~2022 시즌 종료 후 정든 유니폼을 벗었다. 그리고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2017~2018 시즌 종료 후 창원 LG로 트레이드됐습니다. 이적한 첫 시즌부터 팀을 4강 플레이오프로 이끌었는데요.
(LG는 2014~2015 시즌 이후 4년 만에 4강 플레이오프로 향했다. 그리고 2019~2020 시즌부터 2021~2022 시즌까지 3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득점을 얼마나 하느냐보다, 팀 플레이를 먼저 떠올렸습니다. 팀에 필요한 수비와 리바운드, 팀원들을 위한 어시스트와 팀 분위기를 위한 슈팅 정도만 생각했습니다. 이적 첫 시즌에는 결과가 좋았고,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팀 플레이만큼은 아직 괜찮네’라는 생각도 했고요.
그렇지만 폼이 점점 떨어졌습니다. ‘은퇴’라는 단어가 더 크게 다가왔을 것 같습니다.
은퇴를 생각한 결정적인 시기는 2021~2022 시즌이었습니다. 여기까지라는 생각을 했고, 와이프한테도 살짝 이야기했습니다.
‘1년 정도 더 해볼까?’라는 아쉬움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1년 더 한다고 해서, 제 농구 인생에 반전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선수 인생과 농구로 쌓은 커리어에도 미련이 없었고요.
2022년 5월 은퇴를 결정했습니다. 은퇴 후 곧바로 전력분석원 제의를 받았는데요.
감사하면서도 두려움이 컸습니다.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 동안 농구만 했지, 다른 걸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처음 출근할 때도 어색했습니다. 저를 보는 사람도 저도 어색했죠.(웃음)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지금도 하나씩 배우고 있고, 하나씩 적응하는 단계입니다.
선수 때도 창원에서 출퇴근을 했고, 전력분석원이 된 후에도 출퇴근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선수 때는 운동만 하면 됐습니다. 하지만 전력분석원은 여러 자료와 영상들을 체크해야 합니다. 감독님과 코치님께 제출할 자료도 만들어야 해요.
하지만 감독님과 코치님께서 배려해주신 게 있습니다. 선수들이 코트에서 운동할 때, 저도 참관하게 해주신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야간에 김동우 코치님과 함께 어린 선수들의 운동을 봐주고 있습니다. 하루가 정말 바쁘게 지나가는 것 같아요.(웃음)
전력분석원이 아닌 다른 길도 생각하셨을 것 같아요.
사실 저도 지도자의 꿈을 갖고 있습니다. 코치로 가면 제일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렇지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잖아요. 자리가 있어야 하고, 타이밍도 맞아야 하고요.
“방송을 해보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저에게는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관심도 없었고요. 어쨌든 제2의 인생을 농구 쪽으로 잡고 싶었고, 프로농구 쪽에 있고 싶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전력분석부터 차근차근 배우는 게 저한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달라진 시각, 보는 즐거움
강병현은 여전히 창원실내체육관으로 출퇴근한다. LG와 송골매 마크가 아직 그의 가슴에 붙어있다. 팀을 옮긴 게 아니다.
다만, 선수 유니폼을 입을 일은 이제 없다. 선수들처럼 땀 흘릴 일도 없다. 코트에서 농구를 하는 게 아니라, 관중석과 컴퓨터로 농구를 봐야 한다.
모든 게 달라졌다. 하지만 그게 강병현의 시각과 시야를 넓혔다. 마음 한켠에 잠재했던 ‘보는 즐거움’도 알게 됐다. 그는 그렇게 ‘창원 LG 전력분석원’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었다.
비시즌 첫 훈련 때 은퇴를 실감했을 것 같습니다.
운동하는 거 보니, 선수들이 힘들겠더라고요.(웃음) 같이 뛰고 싶을 때도 있었고(웃음), 도와주고 싶은 마음과 이야기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코칭스태프께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감독님과 코치님들께서 “이야기할 게 있으면 이야기해도 된다”고 하셨지만, 입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어떤 게 가장 어려우셨나요?
선수 때는 늘 움직였는데, 지금은 앉아있습니다. 그것부터 적응이 안 됐어요. 또, 낮잠과의 싸움을 아직도 하는 중입니다. 선수 때 낮잠을 많이 잔 게 아니었는데도, 그 시간이 너무 힘들더라고요.(웃음)
전력분석원을 하는 동안, 어떤 걸 가장 많이 느끼셨나요?
선수 때는 외국 선수가 온다고 확정되고 나서야, 그 선수의 하이라이트 필름을 봤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여러 외국 선수들을 한꺼번에 봐야 합니다. 또, 주로 하는 일이 프로 팀에 스카우트할 대학교 선수를 관찰하는 거예요. 그래서 대학농구리그와 MBC배를 많이 봤죠. 그러다 보니, 시야가 넓어진 것 같아요. 농구를 본다는 즐거움도 있고요. 선수 때와 다른 시각으로 보니, 즐거움의 방향이 달랐던 것 같아요.
대학 선수들을 보다 보면, 옛 생각이 나실 것 같아요. 해주고 싶은 이야기도 있을 것 같고요.
대학교에 진학한 선수들은 농구를 어느 정도 하는 선수들입니다. 그런 선수들이 프로에 오고, 프로에 진출한 선수들은 선배들과 경쟁을 해야 합니다. 살아남기 위한 경쟁을 해야 해요.
저 개인적으로 든 생각이 있었습니다. 프로 선수가 오래 살아남으려면, 농구에 임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수비를 죽기살기로 한다든지 루즈 볼 하나에 필사적으로 달려든다든지, 슛을 자신 있게 쏘는 등 마음가짐에 의한 플레이가 먼저 필요한 것 같아요. 대학 선수를 볼 때, 그런 요소들을 먼저 체크하는 이유입니다. 또, 제가 선수들의 테크닉을 볼만한 역량도 안 되고요.
전력분석원으로서 삼은 목표가 있으신가요?
개인적인 목표는 없어요. 그저 팀과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게끔, 도움을 주고 싶어요.
강병현은 여전히 창원실내체육관으로 출퇴근한다. LG와 송골매 마크가 아직 그의 가슴에 붙어있다. 팀을 옮긴 게 아니다.
다만, 선수 유니폼을 입을 일은 이제 없다. 선수들처럼 땀 흘릴 일도 없다. 코트에서 농구를 하는 게 아니라, 관중석과 컴퓨터로 농구를 봐야 한다.
모든 게 달라졌다. 하지만 그게 강병현의 시각과 시야를 넓혔다. 마음 한켠에 잠재했던 ‘보는 즐거움’도 알게 됐다. 그는 그렇게 ‘창원 LG 전력분석원’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었다.
비시즌 첫 훈련 때 은퇴를 실감했을 것 같습니다.
운동하는 거 보니, 선수들이 힘들겠더라고요.(웃음) 같이 뛰고 싶을 때도 있었고(웃음), 도와주고 싶은 마음과 이야기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코칭스태프께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감독님과 코치님들께서 “이야기할 게 있으면 이야기해도 된다”고 하셨지만, 입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어떤 게 가장 어려우셨나요?
선수 때는 늘 움직였는데, 지금은 앉아있습니다. 그것부터 적응이 안 됐어요. 또, 낮잠과의 싸움을 아직도 하는 중입니다. 선수 때 낮잠을 많이 잔 게 아니었는데도, 그 시간이 너무 힘들더라고요.(웃음)
전력분석원을 하는 동안, 어떤 걸 가장 많이 느끼셨나요?
선수 때는 외국 선수가 온다고 확정되고 나서야, 그 선수의 하이라이트 필름을 봤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여러 외국 선수들을 한꺼번에 봐야 합니다. 또, 주로 하는 일이 프로 팀에 스카우트할 대학교 선수를 관찰하는 거예요. 그래서 대학농구리그와 MBC배를 많이 봤죠. 그러다 보니, 시야가 넓어진 것 같아요. 농구를 본다는 즐거움도 있고요. 선수 때와 다른 시각으로 보니, 즐거움의 방향이 달랐던 것 같아요.
대학 선수들을 보다 보면, 옛 생각이 나실 것 같아요. 해주고 싶은 이야기도 있을 것 같고요.
대학교에 진학한 선수들은 농구를 어느 정도 하는 선수들입니다. 그런 선수들이 프로에 오고, 프로에 진출한 선수들은 선배들과 경쟁을 해야 합니다. 살아남기 위한 경쟁을 해야 해요.
저 개인적으로 든 생각이 있었습니다. 프로 선수가 오래 살아남으려면, 농구에 임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수비를 죽기살기로 한다든지 루즈 볼 하나에 필사적으로 달려든다든지, 슛을 자신 있게 쏘는 등 마음가짐에 의한 플레이가 먼저 필요한 것 같아요. 대학 선수를 볼 때, 그런 요소들을 먼저 체크하는 이유입니다. 또, 제가 선수들의 테크닉을 볼만한 역량도 안 되고요.
전력분석원으로서 삼은 목표가 있으신가요?
개인적인 목표는 없어요. 그저 팀과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게끔, 도움을 주고 싶어요.
사진 = 손동환(본문 마지막 사진)-KBL 제공(본문 1~3번째 사진)-강병현 제공(본문 4번째 사진)
일러스트 = 정승환 작가
일러스트 = 정승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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