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이 '방탄노년단'을 알아?..연극계 원로배우들 '티켓 파워'

임석규 2022. 9. 15.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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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재·신구·오영수·정동환 등
경력 50~60년 명품연기 바탕
식지 않는 열정과 연습 더해져
1천석 웃도는 극장에 관객몰이
스테디셀러 '시니어 버전' 공연도
"명품연극 원하는 관객층 화답"
연극 <두 교황>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 교황’ 역을 연기하고 있는 원로 배우 신구(왼쪽)와 정동환. 에이콤 제공

“연극을 소명으로 생각하고 살아왔어요. 음식처럼 좋아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생명과도 같은 거예요.” 80대 중반의 배우 신구가 지난 8일 간담회에서 펼친 연극론이다. 연극 <두 교황>에 출연 중인 그는 “나이가 있으니 (몸이) 삐걱거린다”면서도 “끝까지 (이 연극을) 책임지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로 그의 연기 인생 60년이다.

연기 경력 50~60년을 웃도는 원로 배우들이 연극 무대를 달구며 관객몰이를 하고 있다. 예전의 명성에 기대 얼굴을 내비치는 정도가 아니다. 연극계 판도를 주도하며 ‘티켓 파워’를 자랑한다. ‘연극계의 방탄노년단’이란 세간의 비유가 무색하지 않다.

연극계 ‘원로 파워’를 앞에서 이끄는 배우는 이순재(87)·신구(86)·오영수(78) 트리오다. 데뷔한 지 66년 된 이순재는 지난해 셰익스피어 원작의 <리어왕>에서 주연으로 한달 넘게 무대에 올랐다. 3시간 넘는 대작인데도 전석 매진돼 8회 앙코르 공연이 추가됐다. 지난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으로 주목받은 오영수는 연극 <라스트 세션>에 신구와 함께 더블 캐스팅으로 출연했다. 연극 개막 직후 그가 한국 배우 최초로 미국 골든글로브 티브이(TV) 부문 남우조연상을 받으면서 티켓이 매진됐고, 공연은 2주 연장됐다. 오영수의 연기 경력도 59년에 이른다.

남녀가 50여년 동안 주고받은 편지를 낭독하는 독특한 형식의 연극 <러브레터>에 출연하는 오영수(왼쪽)와 박정자. 장현성-배종옥 조합과는 별도다. 예술의전당 제공

올해도 원로 배우들의 무대 투혼이 빛을 발하고 있다. 200~300석 규모의 소극장이 아니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예술의전당 씨제이(CJ) 토월극장, 한전아트센터 등 1천석을 웃도는 중대형 극장이 이들의 주요 활동 무대다. 신시컴퍼니가 6년 만에 다시 올린 연극 <햄릿>은 원로 배우들이 조역·단역으로 한발짝 물러섰지만 관객의 호평은 여전했다. 출연진이 코로나에 감염돼 공연을 10회나 취소했는데도 흥행에 성공했다. 전무송(81), 권성덕(81), 박정자(80), 손숙(78), 정동환(73), 김성녀(72), 유인촌(71), 윤석화(66), 손봉숙(66) 등 원로 배우 9명이 선보인 고품격 연기가 화제를 불렀다. 최근 개막한 <두 교황>도 신구, 정동환, 서인석 등 원로 배우들의 열연에 힘입어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오는 17~18일 서울 용산아트홀에서 만날 수 있는 연극 <장수상회>에도 이순재, 손숙, 백일섭(78)이 출연한다.

신시컴퍼니가 6년 만에 다시 올린 연극 <햄릿>에 출연한 원로 배우들. 아랫줄 오른쪽부터 권성덕, 전무송, 박정자, 손숙, 김성녀, 정동환, 유인촌. 신시컴퍼니 제공

원로 연극인들이 노인 연기만 하는 건 아니다. 연령대와 무관한 보편적 배역을 맡아 묵직한 연기로 독특한 재미를 선사한다. 대중적 인기가 높은 ‘스테디셀러’ 연극들이 별도의 ‘시니어 버전’을 선보이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오는 17일 개막하는 <아트>엔 이순재, 백일섭, 노주현(76)이 짝을 이뤄 출연한다. 30~40대 배우들의 조합과는 별도의 ‘시니어 특별 버전’이다. 다음달 6일 막을 여는 <러브레터>에서도 박정자-오영수 조합의 ‘시니어 버전’이 눈길을 끈다. 배종옥-장현성 조합과 비교해보는 것도 색다른 묘미를 줄 듯하다. 두 연극 모두 번안된 작품으로, 국내에서 여러차례 공연됐다.

원로 연극배우들이 주목받으면서 과거 주로 티브이에서 활동하던 원로 배우들이 연극 무대로 복귀하는 흐름도 눈에 띈다. 멜로물, 시트콤, 사극 등에서 활약하던 노주현, 서인석(73)이 대표적이다. <두 교황>에서 배우 남명렬과 함께 출연하는 서인석은 이번이 10년 만의 연극 무대다. 노주현도 2015년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이후 7년 만에 <아트>로 연극 무대에 돌아왔다.

세 남자의 우정과 갈등을 다룬 연극 <아트>에 ‘시니어 특별팀’으로 출연하는 배우 백일섭(왼쪽부터), 이순재, 노주현. 더블케이엔터테인먼트·나인스토리 제공

연극에서 원로 배우들이 새삼 주목받는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쌓인 경력과 다져진 관록이 빚어내는 명품 연기가 꼽힌다. 김소연 연극평론가는 “연극 <두 교황>에서 걸음걸이도 조심스러운 배우 신구가 빚어내는 존재감과 깊이감은 대체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국내에서도 팔순 넘어 무대에 설 수 있는 기량을 축적한 배우층이 두터워졌고, 그만큼 연극 무대에 깊이가 생겼다”고 말했다.

연극을 향한 배우들의 애정과 열정도 빼놓을 수 없다. 박정자는 최근 간담회에서 “연극배우는 운동선수와 똑같아서 훈련이 돼 있어야 무대에 설 수 있다”며 “우리 연령대의 배우들이 작품을 한다는 게 그리 쉽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실제로 대부분의 원로 배우들이 지독한 ‘연습벌레’로 통한다. 신구도 “연극은 연습이야, 연습”이라면서 늘 연습을 강조한다고 <두 교황>에 함께 출연하는 정동환이 전했다. 물질적 보상은 영화나 드라마에 비할 수 없지만 연기 자체에서 얻는 배우들의 만족감은 훨씬 크다는 게 중론이다. 원로 배우 정욱(84)은 연초 간담회에서 “자기 관리가 돼 있는 배우들이 무대를 사랑해서, 스스로의 열정으로 무대를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연극 제작 역량의 전반적인 발전을 반영한다는 평가도 있다. 김소연 평론가는 “뮤지컬뿐만 아니라 연극에서도 중대형 규모 극장에서 명품 공연을 올릴 수 있는 제작 역량이 커졌다”며 “명품 배우들이 출연하는 명품 연극을 보고 싶어 하는 관객층이 이런 흐름에 호응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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