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는 섹스와 같다"가 드러낸 韓사회의 민낯

임지혜 2022. 9. 15.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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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상에서 의미 없이 쏟아지는 욕설·조롱
게시물 의미 파악보다 재미가 우선
그래픽=이정주 디자이너

“물리는 섹스와 같다”

국내 유명 물리학자이자 대학교수의 대학 특강 제목이다. 최근 특강을 소개하는 교내 안내문으로 추정되는 게시물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확산하며 화제가 됐다. ‘물리는 섹스와 같다. 물리는 유용한 결과물을 주지만 그것 때문에 그걸 하는 건 아니다’라는 미국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을 인용한 것으로, 물리를 의미심장하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즐겁게 할 수 있다는 점을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해당 강의 주제가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에 퍼지면서 ‘이게 무슨 말이냐’ ‘리처드 파인만이 그런 사람이었나’ 등의 댓글이 쏟아졌다. 강의를 기획한 교수나 파인만의 의도를 이해하거나 물리에 대한 관심보다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성적인 농담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온라인 공간을 점령한 이런 발언들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익명성의 장점 이면에서 인신공격, 욕설, 차별, 조롱 등 ‘플레이밍’이 쏟아지고 집단을 이뤄 극화된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인터넷 문화는 여전한 반면 온라인 커뮤니티 지위는 일부 누리꾼들의 공간으로만 여겨졌던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글이 뉴스가 되고 제20대 대선에서 캐스팅보트로 급부상했던 ‘이대남(20대 남성)’ 현상도 커뮤니티에서 시작됐을 정도로 사회적 영향력이 커졌다. 

대학내일 20대연구소가 지난해 5월 발표한 ‘연령별로 살펴보는 온라인 커뮤니티 이용 행태’에 따르면 전국 17개 시도 만 15~40세 남녀 900명을 조사한 결과, MZ세대의 70% 이상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이용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0대 10명 중 5명(51.4%)은 매일 커뮤니티를 방문했고 20대의 매일 방문율도 41.9%에 달한다. 온라인상의 자극적이고 혐오적인 내용을 자주 접하는 것 자체가 이같은 발언들에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여기에 읽어도 모르는, 읽지 않으려는 분위기까지 만연해지고 있다. MZ세대가 가장 많이 읽는 글은 온라인 커뮤니티, SNS 등 온라인 상에서의 텍스트가 주를 이룰 것이다. 눈으로 빠르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을 찾고 키워드에 집착하며 읽을 내용을 선택적으로 고르게 된다. 분량이 긴 게시글에는 “긴 글은 못 읽겠다” “3줄 요약 해달라” “스압주의”이라는 반응이 빠지지 않는다. 

OECD 주요국의 디지털 정보 파악 능력. 사진=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21세기 독자: 디지털 세상에서의 문해력 개발’ 보고서 발췌 

한국은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21세기 독자: 디지털 세상에서의 문해력 개발’ 보고서에서 만15세 학생들의 피싱 메일 여부 식별을 통해 정보 신뢰성을 평가한 결과, 헝가리·브라질 등과 함께 최하위 집단으로 분류됐다. OECD 평균 이상의 읽기 능력(514)을 보인 한국은 주어진 문장에서 사실과 의견을 식별하는 능력이 25.6%로 평균(47%)에 크게 못 미쳤다. 

‘정보가 주관적이거나 평향적인지 식별하는 방법에 대해 교육 받았는가’에 대한 설문에서 한국은 49%만이 대답해 평균(54%)보다 낮았다. 이는 평가 대상인 한국 학생들뿐 아니라 성인들의 디지털 문해력 역시 높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실제 많은 MZ세대가 긴 글을 읽거나 필요한 것을 추려내고 요약 정리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있다고 한다. 수백장의 보고서를 읽거나 작성하는 것이 업무 중 하나인 한 연구원 팀장 A씨는 “일부 직원들은 보고서 읽는 것을 너무 어려워 한다”며 “긴 글이 아닌데도 쓰는데 며칠이 걸리더라. 확인해보면 맞춤법도 많이 틀리고 글의 흐름도 잘 맞지 않아 읽고 쓰는데 힘들어 한다는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내용의 의미는 보지 않고 공격하는 문화까지 더해지면서 온라인은 소통 창구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논란이 됐던 온라인 게시물로 다시 돌아가보자. ‘물리는 섹스와 같다’ 게시물을 본 한 누리꾼은 강의 의도를 파악하고 “고등학교 때 물리를 잘했다. 지금도 좋아하고 잘한다 칭찬도 듣는다”며 공감했다. 그러자 또 다른 누리꾼이 “요즘 MZ세대는 생각해야 할 개그 안 좋아한다. 참고하라”라고 차단했다. 상대의 생각과 고민이 필요 없단 식의 발언은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지기 어렵게 할 뿐 아니라 분쟁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임지혜 기자 jihy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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