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400만평 철강산단도 잠겼다..공장 가동·원료 수급 막막
형산강·냉천·칠성천 넘쳐 저지대 업체 침수
제철소서 나온 원료 등 받아 돌아가는 '생태계' 무너저
철강 부산물 받아 시멘트·비료 만드는 공장도 침수
국내 철강공급 장기화 및 가격 상승 가능성 커져
“아이고~. 그런 것까지는 당장 어려워요. 지금 여기 완전 전쟁터입니다.”
14일 오전 포항시 남구 철강로에 위치한 포항철강산업단지(이하 산단) 관리공단 관리팀 ㄱ대리가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이날 방문한 공단 관리팀 사무실에선 전화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ㄱ대리가 기자에게 산업단지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해주던 짧은 시간에도 전화벨이 3∼4차례 울렸고, 수화기를 집어 든 그는 미안함과 하소연이 반씩 섞인 목소리로 “지금은 확인이 어렵다” “기다려 달라”는 말을 반복했다.
산단은 포스코 포항제철소와 인접한 산업단지로, 제철소와 긴밀히 연결돼 철강산업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ㄱ대리는 “약 400만평에 달하는 산단의 저지대에 위치한 업체들이 대부분 침수 피해를 입었다. 아직도 구체적인 피해 규모를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바쁜 그를 더 이상 잡아둘 수 없었다.
공단에서 나오는 도로 가에는 미처 처리하지 못한 수해 폐기물이 줄지어 쌓여있었다. 흙 묻은 의자·책상·책장 등 사무실 가구 등과 굳은 진흙 덩어리 등이 태풍 힌남노와 폭우가 입힌 피해 정도를 간접적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강한 물비린내가 풍겼다. 도로 옆을 흐르는 소하천엔 나무와 풀들이 부유물과 뒤엉켜 한 방향으로 누워있다.
산단은 총 4개 단지, 1개 지구로 나뉘는데, 침수 피해가 가장 컸던 1단지는 3면에서 흙탕물이 들이닥쳤다. 북으로는 형산강, 서로는 형산강의 지류인 칠성천, 동으로는 냉천이 범람했다. 동시에 산업단지 내부를 거쳐가는 소하천도 흘러넘쳤다. 특히 세아제강 소구경 강관 공장은 공장 4면 가운데 2면이 소하천과 접해있다. 공장 인근에서 만난 회사 직원은 “비가 많이 와서 공장이 잠기면 펌프로 물을 퍼내 소하천으로 배수하는데, 소하천이 범람하니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고 말했다.
세아제강은 강관(철강 파이프)을 생산한다. 특히 지름 2인치짜리 소구경 강관을 만드는 공장의 피해가 컸다. 공장 안으로 들어서자 출하를 앞두고 다발로 묶인 소구경 강관들 위로 진흙이 쌓여있다. 한쪽에서는 고압 호스로 강관 내외부를 세척하고 있었다. 바닥에 두껍게 쌓였던 진흙은 걷어낸 상태였지만, 공장 입구 부근엔 얇은 진흙층이 가뭄 때 드러난 논바닥처럼 갈라져 있었다. 회사 직원은 “10월 초는 돼야 전 공정이 정상 가동될 것으로 보고 있다”며 “다행히 급한 물량들은 8월에 모두 납품을 해서 당장은 문제가 없지만 내년 초 대량 납품 건이 있어 걱정이다. 설비 가동 준비가 완료돼도 특별연장근로를 하지 않으면 납기가 어려울 수 있다”고 우려했다.
원료 대부분을 포항제철소에서 받아 내연기관용 특수강을 생산하는 ㄷ제강사는 원료수급이 걱정이다. 포스코가 포항제철소에서 생산한 중간제품 ‘슬래브’를 광양제철소로 옮겨 생산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지만, 이 업체가 받아야 할 원료는 광양에서 생산이 어렵다고 했다. 이날 <한겨레>와 만난 이 회사 직원 ㄴ씨는 “현대제철에서 일부 원료를 받지만, 거의 대부분을 포항제철소에서 받는다. 현대제철 물량과 남은 재고가 있어서 아직은 생산에는 문제가 없지만, 장기화하면 납품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철강산업단지에는 철강업체만 있는 게 아니다. 시멘트·비료·화학업체들이 입주해있다. 철강제품 생산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원료로 시멘트와 비료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들도 침수피해와 원료공급난이란 이중고에 직면해있다. 시멘트 회사 관계자는 “철강산업단지 내 시멘트공장뿐만 아니라 경주 등 포항 외곽의 시멘트 회사들도 포항제철소에서 슬러지를 받고 있는데, 슬러지 공급 중단이 장기화하면 생산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말했다.
포스코는 “쇳물 생산을 재개한 상황이라 미미한 수준이나마 부산물 판매도 개시한 상황이다. 향후 쇳물 생산이 늘면 판매량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산단에서 가장 큰 비료업체 한국협화도 침수 피해를 입었다. 경계 철조망은 구겨져 있었고, 시골에서나 맡아볼 수 있는 퇴비 냄새가 도로까지 풍겨왔다. 다만, 곧 비수기여서 생산에 차질을 빚더라도 큰 손해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비료협회 관계자는 전했다.
원료수급만큼이나 공장 설비 가동에 필수적인 스팀·가스 등도 문제다. 이를 공급해주는 업체들도 침수로 가동을 멈췄기 때문이다. 화학업체 오씨아이(OCI) 포항공장은 포항제철소와 산단 입주 업체 대부분에 스팀을 공급한다. 카본블랙(미세한 탄소 분말)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인 스팀을 지하 파이프로 공급한다. 오씨아이 포항공장은 포항 침수의 주범으로 지목된 냉천을 가운데 두고 포항제철소와 마주 보고 있어 침수 피해를 피할 수 없었다. 오씨아이 관계자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침수 피해로 인해) 공장 가동을 하지 못해 스팀 판매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산단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돼있는 구조여서 한 곳이라도 복구가 늦어지면 피해는 이어질 수밖에 없다.
복잡하게 얽힌 철강산업단지 생태계 가동이 침수로 중단되면서 국내 철강 수급상황 악화 문제가 장기화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철강 가격이 상승도 예상된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포항 철강산단 내 다수 기업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해 대안을 마련하고 이번 사태로 인한 철강 수요-공급 영향을 파악하기 위해 민관합동 철강수급 조사단을 이번주 내로 구성해 분석에 나설 것”이라며 “복구물품 조달과 52시간제 한시적 완화 등 복구 과정상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포항/글·사진 안태호 기자 e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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