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의 선거개입, 24국에 3억달러 뿌렸다”
“국영기업·정보국·유령회사 통해 정치인에 현금·암호화폐·명품…
아시아의 한 대선 후보에겐 현지 러 대사가 수백만달러 줬다”
러시아가 지난 2014년부터 최근까지 미국을 제외한 20여 국의 정당 및 유력 정치인을 포섭하고, 해당 국가 선거에 개입하기 위해 최소 3억달러(약 4180억원)를 비밀리에 제공한 것으로 드러났다. 미 국무부는 이를 ‘상대국에 대한 주권 공격’ 으로 규정하고, 관련 정보를 해당국과 공유한 뒤 해결책을 논의하겠다고 13일(현지 시각) 밝혔다.
미 정부 고위 당국자는 이날 전화 브리핑에서 “미 정보 당국은 러시아가 전 세계 24국의 정치 환경을 자국에 우호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해당국 정당과 관리, 정치인에게 그동안 3억달러 이상을 제공했다”고 밝혔다. “최소 수억달러를 추가 송금할 계획도 파악했다”며 “러시아는 (이런 공작을 통해) 이들 국가의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려 한다”고 했다. 네드 프라이스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러시아의 선거 개입은 우크라이나 침공과 유사한 주권 공격”이라고 했다.
이날 국무부 발표에 따르면 러시아는 국영기업이나 연방보안국(FSB) 등 정보기관, 페이퍼 컴퍼니 등을 동원해 외국 정당과 정치인에게 정치 자금을 ‘우회 지원’해왔다. 현금이나 암호화폐, 호화 명품 등을 다양한 방식으로 제공했고, 자금 출처를 숨기기 위해 허위 계약서와 명세서 등을 작성하는 방식을 써왔다는 것이다.
미 정부는 이날 러시아가 자금을 지원한 개별 국가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다만 미 당국자는 아시아 한 국가의 대통령 선거 후보에게 해당국 주재 러시아 대사가 접근해 수백만달러(수억원)를 현금으로 후원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러시아가 금권 공작을 펼친 나라 중에 한국이 포함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AP통신은 국무부 내부 문건을 인용해 “러시아가 중앙아메리카와 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 등 지역에는 국영 기업 등을 이용해 자금을 보냈고, 유럽 지역에는 싱크탱크 등을 통해 자금을 (우회) 지급했다”고 전했다. 특히 유럽 지역에선 유럽연합(EU) 본부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을 거점으로 삼아 유럽 각국 극우 후보들을 지원해왔다고 한다. 또 에콰도르 주재 러시아 대사관은 2014~2017년 선거 개입을 목적으로 거액의 자금을 송금받아 이를 에콰도르에 지원한 것으로 전해졌다. 2017년 알바니아 총선에서도 러시아는 중도 우파 민주당을 후원하기 위해 50만달러(약 7억원)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 정부는 이 같은 공작을 전면에서 추진한 인물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최측근으로 꼽히는 예브게니 프리고진(60)과 알렉산드르 바바코프(59)를 지목했다. 정부 행사에 음식을 공급해 ‘푸틴의 요리사’란 별명으로 불렸던 프리고진은 현재 용병 기업 와그너 그룹의 수장이다. 각국 분쟁에 개입, 민간인 살해와 고문 등을 자행해 악명 높은 와그너 그룹은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 약 1000명의 병력을 보내는 등 푸틴의 ‘해결사’로 활동하고 있다. 러시아 두마(연방 하원) 의원인 바바코프는 미 제재를 위반한 혐의로 지난 4월 기소되기도 했다.
미 행정부가 이날 ‘금권 공작’에 대해 세부 사항까지 공개한 것은 최근 러시아의 선전전과 여론 조작 등에 정면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정치 자금을 동원, 각국 여론을 조작하고 선거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미 행정부 당국자는 최근 러시아의 공작 행태를 담은 외교 전문을 전 세계 미 대사관에 보냈다고 밝혔다.
미 국무부는 러시아가 앞으로 국제 제재를 무력화하기 위해 이 같은 금권 공작을 동원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거액의 자금을 뿌려 확보한 ‘친러 싱크탱크’ 등을 활용해 자국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고, 이를 통해 실제 선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미 당국자는 “앞으로 몇 달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국제사회의 제재 효과를 약화시키고, 자국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중남미와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에서 정치 자금을 포함해 은밀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단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미 정부는 12월 중·러 등을 제외한 110국이 모이는 ‘2차 민주주의 정상회의’에서 러시아의 금권 공작 관련 내용을 공유하고, 대응책을 마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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