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사랑받으려 사랑하지 마세요

윤선경 한국외국어대 영어통번역학부 교수 2022. 9. 15.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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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외롭게 살고 있다. 무관심한 남편은 집을 자주 비우고, 성장한 딸은 더 이상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다. 음악당에서 한 남자를 알게 되어 가까워지지만, 오만한 그는 자기 얘기만 한다. 그럼에도 남자의 말을 들어 주며 사랑하는 그녀. 그러나 여자에게 돌아온 건 차가운 이별통보. 슬픔과 외로움 속에서 여자는 술에 의존하게 되고, 4년 후 기차역에서 죽음을 당한다.

윤선경 한국외국어대 영어통번역학부 교수

이 이야기는 지난 칼럼에서 다룬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1914)의 ‘가슴 아픈 사건’을 시니코 부인의 입장에서 다시 쓴 것이다. 그녀의 관점에서 보니, 우리 삶의 또 다른 층위의 진실, 욕망, 폭력이 드러난다. 그녀는 왜 자기밖에 모르는 남자의 말을 계속 들어주었을까. 그녀는 왜 그의 상처를 알아보고, 기꺼이 자신을 내주었을까. 그녀는 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을까. 나는 그녀가 사랑받고 싶어서, 남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어서라고 생각한다. 이 단편은 사랑받으려 사랑했지만, 끝내 받지 못한 여자의 비극적인 운명을 잘 보여 준다. 그 로맨틱한 목마름이 어떻게 그녀를 파멸시키는지도.

시니코 부인은 왜 그토록 사랑받고 싶었을까. 그것은 당시 아일랜드의 가부장제와 관련이 깊다.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집 안에 갇히고, 자아실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관계를 통해서만이, 남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만이 삶의 이유가 된다. 시니코 부인도 마찬가지다. 남편의 관심을 받지 못하자 더피에게서 사랑을 갈구한다. 자신의 상처에 갇힌 이기적인 그를 모성애로 따뜻하게 감싸 안으면서. 그러나 그마저도 그의 이별 통보로 끝나고, 그녀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결국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그녀는 자신을 완전히 놓아버린다.

그리고 나는 상상해 본다. 시니코 부인의 어린 시절을. 그녀는 분명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들, 특히 장남은 그들 자체로 관심과 애정을 받지만, 딸은 그렇지 않다. 딸이 사랑을 받으려면 사랑해야 한다. 노동과 희생을 해야 한다. 어머니의 집안일을 거들거나 어머니가 아끼는 아들을 챙겨주거나. 그렇게 딸은 조건부 사랑을 받고 애정결핍의 상태로 자란다. 그 결핍은 남자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이 되고, 그 욕망은 필연적으로 마조히즘과 자기소외를 낳는다. 남에게 잘 보이려 할수록, 나는 나일 수 없고 나를 억압하게 되니까. 그 욕망이 여자의 존재 이유가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 자신에게 폭력이 된다.

우리 사회에는 시니코 부인처럼 사랑을 좇다가 불행해진 여자들이 있다. 가족에게 차별당하고 착취당해도 말 한마디 못하고 헌신하는 착한 장녀, 남편이 폭언과 폭력을 일삼고 바람을 피워도 헤어지지 못하는 순종적인 아내, 부모와 남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자 아들에게 집착하는 어머니. 때로 좋아해 주길 바라는 마음은 상대를 지치게 하기도 한다. 원하지도 않는 것을 갖다 바치며 부담을 주고, 애정을 확인받고자 요구하고 통제한다. 그녀들의 짝사랑은 친구, 동료,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비굴한 태도로 드러난다. 상대가 존중하지 않아도 폭력을 휘둘러도, 언젠가는 좋아해 줄 거라 감내하고 이해하려는 그녀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지 않는 그녀들. 그 관계의 욕망 속에서 그들은 자신을 서서히 잃어버린다.

물론 사랑은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이고, 사랑받으려는 마음이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니코 부인처럼 타인의 상처에 아파하고 공감하고 배려할 수 있다. 그 마음은 친절, 봉사, 헌신, 책임감이 될 수 있다. 문제는 나를 잃을 만큼, 사랑받으려 욕망할 때이다. 간절히 바라건대, 이젠 여자에게 사랑이 나를 잃는 수렁이 아닌, ‘나를 찾는 여정’이면 좋겠다.

윤선경 한국외국어대 영어통번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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