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명절 갈등 해소하는 방법
추석 직전, 언뜻 봐도 일흔이 넘은 기사가 운전하는 택시를 탔다. 자연히 추석이 화제에 올랐다.
할아버지 기사님은 어린 시절 추석이 가장 좋았단다. 갖가지 음식을 배불리 먹는 날은 일년 중 추석이 유일했단다. 새 옷을 얻어 입는 날도 추석과 설날 두 번뿐이었단다. 일자리를 찾아 상경한 뒤로도 추석과 설날만 기다렸단다. 고향이 외딴 시골이라 명절 연휴가 아니면 갈 수가 없어서다. 이제 기사님은 추석이 아니라도 배불리 먹고 따뜻이 입고, 연휴가 아니라도 언제든 고향에 갈 수 있다. 하지만 수십년간 반복해 온 추석의 경험은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노년층에 추석이 각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반면 중장년층은 노년층과 같은 결핍의 경험이 없으니 추석이 특별할 이유가 없다.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가족과 친척이 반갑기는 하지만, 번거롭고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추석 ‘노동’을 힘겨워하면서도 재래의 명절 문화에 익숙한 탓에 관성적으로 관습을 따랐다.
하지만 변화의 조짐은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명절 연휴를 이용하여 해외로 떠나는 ‘일탈’을 시작한 것이 중장년층이다. 청년층은 중장년층과 또 다르다. 개인주의와 합리주의를 중시하는 그들에게 구시대적 공동체 문화가 좋게 보일 리 만무하다. 재래의 명절 문화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혐오에 가깝다.
노년층, 중장년층, 청년층이라는 세대 구분이 얼마나 유효한지는 의문이나 세대 간 명절 관념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갈등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젊은이는 관습을 고집하는 어른이 불만스럽고, 어른은 시큰둥한 젊은이가 불만스럽다. 그래도 대개는 갈등을 터뜨리기보다는 묵혀두는 쪽을 택한다. 그렇게 켜켜이 쌓인 갈등이 명절마다 폭발할 조짐을 보인다.
성균관 유도회가 추석을 앞두고 발표한 차례상 음식 간소화 방안은 가족 갈등과 전통문화 혐오를 완화하고자 마련한 고육지책이다. 아무리 그래봤자 차례상이란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리는 법이라는 관념을 고수하는 노년층은 요지부동이다. 하기야 서슬 퍼런 군사정권이 가정의례준칙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한 반강제적 의례 간소화 방안도 결국 절반의 성공에 그쳤으니, 한낱 권고안이 효과를 발휘하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렵다.
누군가는 강력한 입법으로 갈등을 뿌리뽑았으면 하고 바랄지도 모르겠다. 차례상 음식은 다섯 가지 이하, 시가나 처가에 체류하는 시간은 8시간 이하, 불쾌감과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발언 금지, 가사노동 공평분담. 찬성하는 사람이 제법 많겠지만 법제화는 불가능하다. 국가가 사적 영역에 과도하게 개입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민주주의란 그런 것이다. 결국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싸우거나, 설득하거나.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누군가 바꿔주길 기대해봤자 소용없다.
박세당은 임종을 앞두고 3년상 기간 동안 아침저녁 망자에게 음식을 올리는 ‘상식’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예법의 취지에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의 보편적 관습을 벗어난 이 유언이 물의를 일으킬 것을 예상하고 자식들에게 당부했다. “너희가 만약 이 때문에 여러 사람에게 비난을 받더라도 내 유언을 어겨서는 안 된다.” 옳다고 믿는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불편과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싸우고 설득해야 한다. 저절로 바뀌는 것은 없다.
청년세대는 명절 문화에 비판적이다. 기성세대 역시 그 비판에 어느 정도 공감하지만 관습을 벗어나길 어려워한다. 따라서 합의의 여지는 있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설득하지 못하면 싸우겠다는 각오도 필요하다. 싸울 용기도 없고 설득할 자신도 없다면 고생스러운 명절은 계속된다.
장유승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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