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1의 목소리] 도축장에서 흘린 피와 땀, 이젠 인정받고 싶어요
정현호 | 공공운수노조 가축위생방역지원본부지부 조합원
“저는 우리나라 축산물이 위생적이고 안전하게 밥상에 올라갈 수 있도록 도축 단계에서 철저하게 검사하는 도축검사원입니다!”
그 누구보다 당당하고 자부심 넘쳤던 14년 전 나의 다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누군가 나의 직업을 묻는다면 “도축장에서 일해요…”라고 말끝을 흐리며 자리를 피하곤 한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이 일을 시작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 직업이, 소속이, 신분이 부끄럽고 창피해지기 시작한 이야기를 꺼내보려 한다.
아침 출근길, 굽이굽이 좁은 도로를 달려가다 보면 불쾌한 냄새와 가축들의 비명이 차 안으로 스멀스멀 전해진다. 근무지에 도달했다는 신호다. 검사관실에 마련된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일과를 시작한다. 나와 같은 도축검사원들은 소속 사무소가 있지만, 도축장에서 상시 근무를 하기에 도축장이 내근지다.
하지만 회사는 사무실을 임차할 예산이 없고, 축산물위생관리법에 의거해 시·도지사가 임명·위촉한 수의직 공무원인 검사관처럼 법적으로 사무실을 제공받을 권리도 없다. 그래서 검사원들은 도축장에 부탁해 남는 사무실을 얻어 쓰거나 검사관실 한쪽을 빌려 근무한다. 공식적으로 사무실이 없으니 사무집기 구매 예산도 없다. 업무용 컴퓨터 절반가량은 사비로 구매한 것이고, 프린터와 팩스는 다른 기관이나 업체 눈치를 봐가며 빌려 쓴다.
어떻게 정부에서 일을 시키면서 기본적인 업무환경조차 만들어주지 않는가? 신세 한탄도 잠시, 도축 시작을 알리면 서둘러 복장을 갖춰 입는다. 방수 방역복, 위생장화, 안전장갑 위에 라텍스장갑, 방수 앞치마, 방수 토시, 안전 고글, 위생모, 그 위에 안전모까지 착용해야 비로소 복장이 갖춰진다. 삼복더위에 일은 시작도 안 했는데 이마와 등줄기에 땀방울이 흐르기 시작한다. 도축장이란 곳이 안전사고와 인수공통감염병 발생 빈도가 높고 위생적으로 관리돼야 하는 곳이기에 위생·안전장구 착용은 필수다.
나의 주 업무는 도축검사와 시료 채취다. 도축되는 가축의 내장과 지육이 식용으로 적합한지, 항생제가 남아 있는지, 도축장 환경이 위생적으로 관리되는지 검사한다. 그리고 가축들이 백신은 잘 맞았는지, 구제역·아프리카돼지열병·광우병 같은 전염병으로부터 안전한지 검사하는 데 필요한 시료를 채취한다.
현장에 들어서면 먼저 습한 기운에다 시끄러운 기계 소음이 귀마개를 뚫고 고막을 찌른다. 소의 머리와 다리가 잘리고 가죽이 벗겨져 내장적출 단계로 넘어오면, 장기·림프절 검사 같은 해체검사를 한다. 한 손에는 날이 바짝 서 있는 검사용 칼을 들고, 다른 한 손은 미끄러운 내장이 손상되지 않게 조심스레 잡아당기고 밀고 뒤집어가며 바쁘게 장기의 상태를 살피며 내장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림프절을 찾아 절개해 검사한다.
사료로 가득 찬 소의 장기는 상상 이상으로 거대하다. 성인 남성 몸무게 정도인 소의 장기를 매일같이 뒤집고 펼치고 들어 올리기를 10년 넘게 반복한 결과, 왼쪽 어깨에 석회성 염증이 생겨 왼팔을 자유롭게 들어 올릴 수 없다. 나뿐만이 아니다. 불안정한 자세로 반복적인 업무를 하다 목, 허리 통증을 호소하는 후배들이 적지 않다. 그래도 오늘도 현장에서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숙여가며 일한다. 몸이 망가져도 ‘공공기관 직원’이라는 사명감으로 국민에게 위생적이고 안전한 축산물을 공급한다는 책임감으로 통증을 참아가며 근무한다.
하지만 도축검사원은 법적으로 도축검사 업무의 주체가 아닌 보조다. 검사관 업무를 돕는 보조. 따라서 내가 검사한 축산물의 관련 서류에 내 이름은 없다. 물론 실상을 살펴보면, 도축검사원들은 전국 대부분 도축장에서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해체검사와 지육검사의 주체가 되어 일당백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열심히 도축검사를 수행해도 공식적으로는 없는 존재인 셈이다.
내가 소속된 가축위생방역지원본부는 가축방역 현장을 책임지는 작은 기관으로 시작해 이제는 정원 1200명 넘는 현장 전문기관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정원의 약 95%가 무기계약직이라는 기이한 구조로 구성돼 있다. 특히 현장직원 전원이 무기계약직이다. 승진은 기대할 수 없고, 수당이나 상여금도 일반직과 차별대우를 받는다. 올해 1월, 꽁꽁 얼어붙은 손으로 피켓을 들고 임금도 포기한 채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경고파업 총결의대회를 열어 이런 부당한 현실을 개선해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8개월이 흐른 지금 달라진 것은 별로 없고, 희망을 잃고 지쳐 회사를 떠나는 후배들이 늘고 있다. 14년 전 입사했을 때 다짐처럼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는 일터가 될 수는 없을까. 도축검사원에게도 사무실과 승진 기회가 주어지고, 검사원도 검사에 참여했다는 문서 한장 남길 수 있는 그날이 어서 오길 바란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4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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