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K정치에는 없는 것들
K정치 사용하는 단어, 무섭고 비장해
관점·성향 따른 차이부터 수용해야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은 “아홉 명의 늙은이가 나라를 망친다”고 탄식했다. 의회가 뉴딜 정책 시행을 위해 제정한 각종 법률에 대해 대법관 9명의 연방대법원에서 잇따라 위헌으로 결정하면서다. 87체제로 우리나라에도 헌법재판의 시대가 열리면서 정치가 사법에 의지하는 사례는 빈발해졌다. 그 여파 속에 법원과 검찰이 여의도발 정치의 종말처리장으로 불린 것도 오래된 일이다. 타협과 양보에 실패한 정치적 갈등은 이곳에서 법적 처리를 거쳐 종착지를 찾았다.
정치의 사법화는 임계치를 넘어선 정치 갈등에서 불가피할 수 있다. 그래도 하책(下策) 중 하책인 것은 분명하다. 퇴고가 인정되지 않는 사법적 판단에 대한 정치적 해석이 사법의 정치화, 법원과 검찰 불신으로 치닫는 것은 그 부작용이다.
K컬처가 미국 에미상 주요 부문을 수상한 다음 날 K정치는 법관 앞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설명했다. 집권 국민의힘의 당권 내분은 비상대책위원회 효력을 다투는 가처분신청 사건 심문이란 낯선 풍경을 사법부에서 연출했다.
야당에는 이제 검찰의 시간이다. 제1야당 대표는 선거법 위반으로 2건이 기소돼 법관에게 무죄를 증명해야 할 처지다. 다른 의혹 사건들의 검찰 조사도 앞두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불편부당한 정치적 중립지대로 옮기겠다고 약속했던 그 검찰에서 하는 일이다. 검찰엔 정치보복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일일 뿐이다. 야당 입장에선 집권세력이 정치적 반대자를 공격하는 데 이보다 효율적인 수단이 없다. 그러나 민주화, 인권 등과 관련돼 있다면 몰라도 개인비리 사건의 대표를 위해 당이 나서는 것 역시 익숙지 않은 풍경이다.
자정능력을 상실한 듯 K정치는 전쟁과 정치를 혼동할 만큼 비장하다. 전쟁, 인질, 죽이기, 옥쇄, 방탄조끼, 정적, 보복 같은 무시무시한 단어가 툭툭 튀어 다닌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법원에 낸 가처분신청 탄원서에는 1980년 서울의 봄을 언급한 이런 대목이 있다. “서울역에서 회군했던 사람들이 며칠 뒤에 광주에서 발생한 비극을 보고 그 짐을 나눠 짊어지지 못한 것을 평생 자책하는 것을 보면서 작금의 정당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도 제가 짊어질 수 있는 만큼은 짊어지고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필사즉생(必死卽生)은 명량해전을 앞두었다면 군의 사기를 진작시킬 훌륭한 각오일 것이다. 평시라면 사정은 다르다. 중국인들은 ‘죽기만을 각오하고 싸우면 죽는다’는 손자의 필사가살(必死可殺)을 지도자가 빠지기 쉬운 위험으로 경계한다.
여의도 정치는 왜 하책에 머물며 갈등과 대립을 반복할까. 인류학자가 연구한다면 아마 정치인이 사는 세계에 대화, 타협, 협치란 단어가 없기 때문이라고 할 것 같다. 대화와 타협, 승복이란 개념이 없기에 이를 추구하는 것을 정상적인 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 정치가 늘 다른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면 이론을 달기 어려워 보인다. 민주주의를 떠나 중요한 것은 같은 내용을 가지고도 관점, 성향에 따라 보는 것이 다를 수 있고 그런 차이를 수용하는 일이다.
소설 ‘하얼빈’에서 연해주로 간 안중근은 한인들이 300여 명의 병력으로 결성한 의병대의 참모중장을 맡아 우영장 직책으로 50여 명을 거느렸다.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3명의 포로를 잡았으나 이들을 죽여 없애는 것이 국권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끝에 주변 반대를 무릅쓰고 무기까지 주어 놓아줬다. 결국 이들이 위치와 병력 규모를 보고하는 바람에 안중근 부대는 일본군 공격을 받고 흩어져야 했다. 하지만 이후 하얼빈 의거로의 귀결은 어쩌면 안중근의 이런 다른 생각의 연장선에서 이뤄졌던 일이다.
이태규 논설위원 tg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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