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그래프] (37) 단국대 염유성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 다할 것"
#염유성에게 은사님 같은 존재였던 故 박광호 코치
염유성은 어릴 적 운동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현재와 달리 농구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축구와 야구를 좋아했다. 4학년 말 학교에 키 큰 성인이 찾아와 달리기 빠른 학생을 찾았다. 엘리트 농구선수를 스카우트하기 위해서였지만 농구부 동아리원을 모집하는 줄 알았던 염유성은 손을 들고 자원했다.
“동아리 농구인 줄 알았어요(웃음). 부모님께도 하고 싶다고 했더니 흔쾌히 수락해주시더라고요. 그땐 이미 시즌이 끝난 뒤여서 제대로 농구를 배운 건 5학년부터로 기억해요. 겨울에 동계 훈련을 가게 됐는데 부모님께서 동아리가 무슨 전지훈련을 하냐고 반대하셨어요. 코치님께 전화해서 농구 안 시키겠다고 하시기도 했죠.”
하지만 운동을 좋아하고 활발한 학생이었던 염유성은 농구라는 스포츠에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본인에게도 생소한 종목이었을 뿐 아니라 그의 부모님도 잘 모르는 구기 종목이었지만 피아노 학원과 각종 학업을 병행하는 조건으로 그는 농구를 시작하게 됐다.
“6학년 때부터 농구에 전념할 수 있게 됐어요. 초등학교 코치님이 바뀌시면서 박광호 코치님이 오셨거든요. 농구를 기초부터 배울 수 있게 해주신 은사님 같은 분이세요. 당시에 또래에 비해 잘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어떤 게 잘하는 건지 몰랐고 농구공을 좋아해서 공만 쫓아다녔을 뿐이었지만 선생님께서 많이 바꿔주셨죠.”
염유성은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진로에 대해 부모님과 상의를 나눴다. 염유성도 농구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고, 코치님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농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대전중에 진학한 염유성은 이상열 코치를 만나 이전의 안 좋은 습관들을 고쳐나갔고 발전을 거듭했다.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는 박광호 코치를 다시 만났다. 염유성은 잦은 부상을 겪기도 했으나 은사님과 재회하여 농구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나갔다.
고등학교 입학 전 새로운 환경으로 전학을 원했던 염유성은 코치의 만류로 연계 학교인 대전고 진학을 선택했다. 중학교 때에도 부상이 있었던 그는 고등학교 입학 직후 피로골절로 발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여수에서 하는 비공식 대회가 있었는데 통증이 있어서 첫 경기를 쉬었어요. 계성고와 두 번째 경기를 치르다가 레이업 하는 상황에서 발목이 부러졌죠. 재활을 1년 가까이하고 나서 복귀했던 것 같아요. 아마 복귀하자마자 전국체전을 뛰었을 거예요.”
염유성은 부상 여파가 있었음에도 전국체전에서 쾌조의 컨디션을 자랑했다. 부산중앙고전에서 26점을 올리며 팀 공격을 이끌었고, 삼일상고와 8강에서는 30점을 맹폭했다. 복귀 후 최고의 활약을 펼친 그에게 많은 이목이 집중됐지만 곧바로 발목이 다시 부러졌다.
“다른 선수들은 부상당하면 좌절하기 마련인데 저는 쉬어가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푹 쉬었어요. 정상적인 팀 훈련은 당연히 못했지만 웨이트 트레이닝이나 보강 훈련에 초점을 맞췄어요. 이전까지는 대학에서 관심을 많이 보여주셨는데 다치고 오래 쉬니까 그만둔 거 아니냐는 말도 많이 나왔던 것 같아요(웃음).”
긴 회복 기간을 지낸 염유성은 2학년이 되고서야 복귀할 수 있었다. 발목이 연달아 말썽을 부렸지만 그는 웨이트 트레이닝과 충분한 휴식으로 공백기를 극복했다. 2학년 때 삼일상고와의 리벤지 매치에서 3점슛 7개 포함 48점을 올린 염유성은 많은 이들에 본격적으로 본인을 알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대학에서 러브콜도 다시 늘어났다.
“고등학교 때 왼쪽 어깨 탈구도 있었고 발목 부상도 있었지만 큰 슬럼프가 오진 않았던 것 같아요. 단지 쉬면서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죠. 복귀하면 더 열심히 하기 위한 이미지 트레이닝에 열중했던 기억이 나요.”
“대학교를 정할 때 어린 마음에 꼭 연고대가 아니더라도 프로에 가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단국대를 간다고 했을 때 주변에 이해 못 하는 분들이 많았지만 저는 후회 안 할 자신 있었거든요. 어려서 그런지 자신감이 가득했어요(웃음).”
염유성은 윤성준(현 현대모비스)과 이두호 등에 의지했다. 대중들은 단국대를 보며 1학년 비중이 크다고 말했지만 염유성은 선배들의 배려에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다. 1학년 때부터 팀의 주축으로 자리 잡은 염유성은 동기 이경도와 함께 핵심 멤버로 우뚝 섰다.
올해 초 코로나19 집단 감염으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시즌을 시작한 염유성은 시즌 초반 오른쪽 어깨 탈구 부상을 당했다. 대학교 입학 후 첫 리그를 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한 번의 공백기를 가져야 했다.
“1학년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했다면 2학년 때는 노련미나 성장세를 보여줘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기회가 없어졌다고 생각했어요. 부상을 당했을 때마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조급함이 생기더라고요. 감독, 코치님께서 많이 배려해 주셨죠. 리그 뛰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 제 몸 생각해서 천천히 재활하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염유성의 열정은 말릴 수 없었고, 코칭스태프도 팀의 선전에 욕심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염유성은 컨디션이 올라오지 않은 상태에서 곧바로 경기에 투입됐고, 어깨는 키네시오 테이핑에 의지했다.
“몸도 20% 정도 올라오자마자 바로 경기를 뛰었어요. 못할 수밖에 없었죠. 저 때문에 경기를 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고 슬럼프가 찾아온 것 같더라고요. 그럼에도 부상이라는 핑계로 도망가고 싶지는 않았어요. 제 슛 밸런스 하나 잡겠다고 감독, 코치님들이 엄청 신경 써주셨고, 코치님은 체육관 불 꺼질 때까지 저를 도와주셨어요. 동생들도 마찬가지고요.”
“MBC배 한양대전 하기 전에 감독님, 코치님께서 테이핑 없이 해보자고 하셨어요. 괜히 붕대 때문에 더 의식해서 안 풀릴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죠. 솔직히 부상에 대한 트라우마가 심해서 걱정도 됐고, 또 다치면 일어설 힘이 사라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다시 도약할 수 있었어요. 덕분에 맘 편히 남은 경기들을 소화할 수 있었고 거기서 잠재력이 터진 것 같아요.”
대학교 입학 전부터 얼리 엔트리 계획이 있었던 염유성은 올해 신인 드래프트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크고 작은 부상들과 대학 입학 후 징크스까지 겹치며 다사다난한 2년을 보낸 그지만 농구를 시작하고 항상 꿈꿔오던 프로 무대를 밟고 싶은 마음을 포기할 수 없었다.
”코트 안에서 항상 즐거워 보이는 선수로 비치고 싶어요. 농구를 시작했을 때부터 웃으면서 했거든요. 그것 때문에 간절해 보이지 않는다고 혼난 적도 있지만 팬들이 웃으면서 경기 뛰는 선수는 처음 본다고 칭찬해 주셔서 이게 제 무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남들이 봤을 때 제가 농구를 하면서 정말 행복해 보인다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그는 이어 ”항상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제 선택을 후회해 본 적이 없어요. 남들이 아니라고 해도 제 생각이 맞으면 옳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옳은 게 아니더라도 제가 노력하면 옳은 길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요. 앞으로 제 인생에서도 후회하는 일 없도록 만들 거예요.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선수가 되어 돌아가신 박광호 선생님께도 자랑스러운 제자가 되고 싶어요“라는 포부를 드러냈다.
MBC배를 시작으로 대학리그 본선까지 본인의 잠재력을 증명한 염유성의 가치가 점점 상승하고 있다. 대학 무대 2년을 포기하고 프로 무대에 도전장을 내민 염유성의 행보를 주목해 보자.
# 사진_ 점프볼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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