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호 "나도 피해자"?..진짜 피해자들이 보고 있는데

손령 2022. 9. 14.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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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

"나도 피해자"

밀정 의혹이 제기됐던 초대 행정안전부 경찰국장 김순호.

김 국장은 자신도 신군부의 녹화공작 피해자라며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요청했다.

녹화공작은 전두환 정권 시절인 지난 1980년대 초, 학생운동 전력자들의 생각과 이념을 바꾸고, 출신 대학교의 학원 첩보를 수집하는 소위 '프락치'로 활용했던 사업이다.

때문에 성균관대 학생이었던 김 국장 역시 자발적으로 밀정 활동을 한게 아니라 강제 징집을 당해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라는 것이다.

과연 그의 해명이 사실일까.

하나씩 따져보도록 하자.

"술마신 것만 보고했다"?

김순호 국장에 대한 밀정 의혹이 제기된 건 경찰국장 내정 직후였다.

김 국장의 해명은 단호했다.

녹화공작 대상자였던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당시 친구들과 술 마신 것만 보안사에 보고했을 뿐 다른 내용은 밀고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MBC가 입수한 문서들은 김 국장의 해명과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김 국장이 군 복무 시절 보안사에 보고한 문서 중 일부다.

당시 성균관대 주요 이념 서클들의 조직도와 핵심 인물, 심지어 학생 운동에 대한 탄압을 피하기 위해 만든 지하 조직과 실질적 리더의 인적사항까지 기록돼있다.

김 국장은 핵심 인물에 대한 평가, 읽었던 책,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조직의 방학 MT 일정까지 상세히 보고했다.

성대 1년 선배이자 이념 서클 '심산 연구회' 회장이던 최동 씨와 싸운 일을 비롯해 최 씨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 이후 자신이 '심산 연구회' 차기 회장으로 결정된 일화 등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으로 확인됐다.

훗날 최동 씨는 녹화 공작 과정에서 잠 안재우기 등의 가혹 행위를 당한 뒤 후유증 등으로 분신해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친구들과 술 마신 것만 보고했다던 김 국장의 해명과는 분명 큰 차이가 있다.

"B등급으로 하향‥적극적 활동 안 해"

잇따른 의혹제기.

해명을 요구하는 국회의원들의 추궁.

그럼에도 김 국장은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녹화공작 당시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녹화공작 대상자는 A,B,C 세 등급이 있는데 본인은 A등급에서 B등급으로 하향됐다며 근거까지 제시했다.

하지만 이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입대 직후였던 1983년 4월 김 국장은 대학 서클 조직의 직책 등이 고려돼 B등급으로 책정됐다.

그 후 1983년 11월, 일병이 된 김 국장은 학내 동향 등을 상세히 보고했다.

특히 문서에는 '김순호 제보' 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수많은 녹화공작 피해자들의 존안 문서와 비교해도 나오지 않는 이례적 표현을 쓴 문서다.

비교적 자발적인 보고라고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문서 표지에 가필해놓은 문구에는 '성대 의식화 실태 종합'라고 써놓을 정도로 각별한 의미를 부여해놨다.

공교롭게도 김 국장은 상병이 되면서 A등급으로 상향 조정됐다.

국회에서 김 국장은 A등급이던 본인이 B등급으로 하향됐다며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항변했지만 이미 보안사 심시기간이 끝난 83년 11월 이후, 더이상 활용 가치가 사라졌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노동 운동한 적 없어"

"노동 운동을 한 적이 없다"

밀정 의혹에 대한 보도가 잇따르자 김 국장이 내놓은 해명이다.

군대에서는 강제 징집 피해를 당한 것이고 제대 후에는 노동 운동을 한 적이 없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학 동기들, 그리고 노동 운동 동료들의 기억은 이와 달랐다.

전역 후 성균관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복학 대신 노동 운동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김 국장 역시 그 현장에 있었던 것이라는 증언이다.

이들은 실제 인천 지역에 모여 노동운동 계획을 논의했고 공장에 취업했다.

김 국장과 성균관대 81학번 동기이자 같은 시기 군에 강제 징집됐던 이용성 씨 역시 김 국장과 함께 노동 운동을 위해 회의를 했던 기억이 있다고 증언했다.

역시 대학과 군대 동기인 김현동 씨의 증언도 비슷했다.

제대 후 노동운동을 위해 부천 지역으로 갔으며 옆 방에서 합숙을 했다고 말했다.

노동 운동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노동 현장에서 기술을 익혔다는 것이다.

다만, 합숙 생활 중에도 누나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는 점은 당시에도 불만스러운 대목이었다고 기억했다.

김 국장이 공장에서 프레스공으로 일했으며 함께 노동운동을 했다는 동료들의 증언은 이 외에도 차고 넘친다.

이후 김 국장은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 부천 지역 책임자까지 맡으며 노동운동을 이어나갔다.

김 국장 주장대로 그 활동들이 노동운동이 아니라면, 일부의 의혹대로 노동운동을 밀고하기 위한 밀정 활동을 했던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주사파에 회의 느꼈다"?‥의문의 행적

"주사파에 회의를 느꼈다"

노동 운동을 함께 했다는 동료들의 증언이 잇따르자 김 국장은 또 다시 전략을 수정한다.

김 국장이 속해있던 인노회는 주사파가 아니라는 재심 결과에도 불구하고 인노회를 주사파로 규정하는 건 헌법적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냐는 지적까지 제기됐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물론 굳이 그 뜻대로 해석하자면 당시 자신의 판단이 그러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함께 노동운동을 했던 동료들이 구속되는 동안 자신만 구속을 피하고, 오히려 이들을 잡는 치안본부 경찰이 됐다는 건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또, 김 국장의 이사를 도와주기 위해 김 국장의 집을 찾았던 한 동료는 당시 김 국장이 노동 운동과 관련된 이른바 '지라시'를 상자에 모아두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서슬 퍼렇던 시절 노동 운동과 관련된 '지라시'는 모두 숨기가 마련인데 누가 봐도 위험한 행동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김 국장은 혼자가 아니라 누나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김 국장이 노동현장에 나타나지 않기 시작하면서부터 인노회 회원들은 줄줄이 구속된다.

특히, 1989년 4월 말 경찰에 끌려간 한 인노회 회원은 부천 지역 조직원들의 가명이 포함된 조직도 등 경찰이 조직을 상세히 알고 있어 놀랐다고 기억한다.

조직도 중 부천지역 조직원들 이름이 모두 공란이었던 4월 초 조직도와는 큰 차이가 있다.

부천 지역 책임자였던 김 국장만이 알 수 있는 내용들이 채워져 있었던 건데 이 역시 김 국장이 사라졌던 시기와 겹친다.

김 국장은 자신이 경찰을 찾아간건 그 해 7월이었기 때문에 인노회 회원들의 구속과는 상관없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당시 김 국장의 특채를 담당했다던 당시 홍승상 경감이 다른 언론과 했던 인터뷰 내용은 김 국장의 해명과 다르다.

김 국장이 1989년 초 자신을 찾아와 운동권에서 발을 빼도록 도와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김 국장의 말이 맞다고 치자.

김 국장은 홍 경감을 찾아간지 한 달 만인 1989년 8월 경장으로 특채돼 치안본부에서 일을 시작한다.

'주사파'였다던 인노회 회원들이 구속될 때, 밀고 없이 자수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구속과 처벌을 면하고 오히려 경장 특채됐다는 것이다.

자료:이성만 의원실

특채 과정을 보자.

당시 대공 특채 지원자는 1명.

1대1의 경쟁률로 합격했다.

그 후 1년 만인 1990년, 김 국장은 범인검거 유공으로 두 차례나 치안본부장 표창을 받는다.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다.

이후 과제

이처럼 김 국장을 가까이서 지켜본 동료들의 증언과 관련 문서들은 김 국장의 해명들과 다르다.

당연히 여러 의혹들도 해소되지 않았다.

김 국장은 윤희근 경찰청장 청문회가 열렸던 지난달 8일 국가기록원에서 자신의 보안사 시절 인사기록인 '존안 자료'를 받아간 것으로 확인됐다.

본인도 관련 자료를 확인한 것이다.

그동안의 주장이 맞다는 자신이 있다면 본인의 기록을 공개해야 한다.

또, 당시 보안사 자료를 보면 김 국장을 조사했던 심사 장교는 현재 유력 방송국 사장으로 있는 이 모 씨,

당시 심사를 맡았던 공무원 우 모 씨,

김 국장의 특채에 관여했던 홍승상 전 경감 등 진실을 가리기 위한 관련자들의 용기있는 증언이 절실하다.

경찰 역시 당시 공안자료로 지금도 보존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김 국장의 최초 진술 기록 등을 공개해야 한다.

그래서 김순호는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와보자. 김 국장은 피해자인가.

강요된 협조 아래 나약한 인간에게 목숨을 걸고 지킬 것을 강요할 수 없다.

변절과 전향에도 물론 자유가 있다.

김 국장 외에도 많은 이들이 그랬다.

이를 폭력적으로 평가하자는 게 아니다.

동료들의 약점을 이용해 자신의 영달을 취했다면 이야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런 인물이 국가 핵심 요직에 올랐다면 어떤가.

공교롭게 지금의 경찰국 역시 그런 역할을 강요받을 것이란 의혹을 받고 있지 않은가.

정부가 경찰을 길들이기 위해 만든 조직이란 의심 때문에 경찰 내부 반발 또한 거세다.

김 국장의 삶의 궤적에서 그런 경찰국의 수장을 맡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인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공무원으로서 국가의 부름에 소임을 다한다는 말로 가능할까.

문서를 어떻게 봤냐며 수사에 나설 것이라 협박하는 게 올바른 대처일까.

김 국장의 신청을 받은 진화위는 앞으로 석달 가량 동안 김 국장의 강제 징집 피해 여부에 대해 심사해야 한다.

물론 김 국장이 녹화 공작 대상자로 지정돼 강제 징접된 피해자라는 점이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

김 국장이 노리는 바도 그 대목일 것이다.

하지만 강제 징집된 피해자라고 해서 동료들을 밀고하고 그 댓가로 승승장구했다는 의혹의 부분까지 정당화되진 않는다.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이유 역시 간단하다.

누군가의 지나간 과거를 들춰내고 괴롭히자는 게 아니다.

김 국장이 어떤 평가를 받고 어떤 자리에 가게 되는지가 지금 우리는 물론 미래 세대에게 큰 본보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가 아닌 현재, 그리고 미래를 위한 일인 만큼 앞으로도 담담하게 관련 의혹들에 선입견을 갖지 않고 있는 그대로 취재하고 기록해나갈 수밖에 없다.

[탐사보도] 경찰국장 '밀고 공로' 특채 의혹 관련 기사 https://imnews.imbc.com/newszoomin/groupnews/6396974_29116.html

MBC 손령

(손령right@mbc.co.kr)

기사 원문 - https://imnews.imbc.com/newszoomin/newsinsight/6407551_2912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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