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Inside] 프로 도전 앞둔 부산대 '최고 승부사' 박인아 (1)
부산대학교가 어김없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지난 2021년 후반기에 잇따른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해 훈련에 돌입하기 쉽지 않았고, 부상자들까지 나오면서 부산대는 시즌 막판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코로나19 여파로 지난 2020년에 이어 2021년에도 리그가 대회 형식으로 열렸고, 부산대는 후반기 대회에 나서지 못해 연속 우승 도전에 실패했다.
무엇보다, 부산대는 전반기 대회에서 주전 가드이자 팀의 중심인 박인아가 부상을 당하고도 정상을 밟았다. 박인아는 예선 경기에서 왼쪽 아킬레스건이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으며, 이로 인해 1년 이상 결장할 수밖에 없었다. 1년 여의 공백을 딛고 이번 시즌 초반에 돌아온 그녀는 어김없이 부상 이전의 모습을 보여주며 팀의 중심을 확실하게 잡고 있다.
그녀가 돌아올 즈음에 그녀를 부산대학교 교정에 만나 진솔한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 덧 4학년이 된 그녀의 농구에 대한 이야기와 살아가는데 있어 추구하는 부분까지 많은 부분을 들을 수 있었고, 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 박인아
대신초등학교 – 동주여중 – 동주여고 - 부산대학교
Q : 농구를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A : 초등학교 4학년 말 5학년 초 즈음 시작. 체육을 좋아했다. 학교에서 하는 육상 대회나, 구기 종목을 좋아했다. 겨울이 되면 농구 코치님이 키 큰 애들을 데려가서 테스트를 봐주셨다.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농구부 부장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의 권유로 농구공을 잡게 됐다.
(박인아는 이 때를 떠올리며 “학교에 농구부가 있는지 몰랐어요. 뛰어 놀고 하는 게 좋았어요. 부장 선생님께서 담임 선생님이셨던 게 컸어다. 아직도 연락하고 지내요”며 자신을 이끌어 준 선생님을 잊지 않고 있었다.)
Q : 초등학교 때는?
A : 5학년 때부터 뛰었다. 근데 기억이 하나도 잘 안 난다. 그만큼 한 게 없는 거라 생각한다. 6학년 때, 쇄골이 부서지는 부상을 당했다. 첫 대회 학교가 준우승을 했다. 소년체전부터 복귀해서 남은 애들이랑 우승했다. 이경은(부산대), 이윤미(KB), 안주연(대구시청) 네 명은 고등학교 때까지 같이 했다. 맨날 장난친다. 징글징글하기도 하다. 그만 보자고.
(박인아는 이들과의 관계에 허물이 전혀 없어 보였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함께 했기 때문. 그 중에서도 이경은과는 대학에서도 함께 뛰고 있으며, 이윤미와도 오프시즌에 자주 보고 있다. 이윤미는 오프시즌 중에 부산대를 직접 찾아 부산대 선수들과 훈련에 나서기도 했으며, 이경은과 박인아의 경기를 직접 관전하기도 해 진한 우애를 드러내기도 했다.)
Q : 중학교 때는?
A : 이미 다 큰 애들이었다. 원래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갈 때 크는 시기여서 힘이 없는데, 저희는 이미 다 커 있었다. 다른 선수들보다 힘이 훨씬 좋았다. 매번 풀코트 프레스를 시도했을 정도였다. 하프라인을 못 넘어오게 한 적도 많았다. 중2 때까지 잘 써먹었다. 우승도 했다. 많이 우승했다. 중3 때는 비등비등했다. 우승과 준우승을 반복했다. 중학교 때 우승을 많이 했다. 2학년 때 제일 많이 한 것 같다.
(박인아는 이 때를 떠올리며 “(이)경은이가 이 때 정말 잘 했어요”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적수가 많지 않았다면, 연이은 우승이 무엇보다 달콤했다고 회상했다.)
Q : 고등학교 때는 또 달랐을 것 같다
A : 선수가 없더라. 언니들도 다 그만뒀다. 매번 6~7명이 농구를 했다. 경기 잘 하고 하면 3위하고 그랬는데 2학년 때 한 번 우승했다. 여고 팀이 경기를 잘 나오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팀도 15개 정도인데 많이 나와야 9~10팀이 전부였다. 결승까지 해도 네 경기 정도니 경기가 많지 않았다.
(박인아는 고교 시절 연습과 시합을 지속하기 쉽지 않았던 여러 제반 조건에 아쉬워했다. 그러면서도 “고1 때 농구가 늘었어요. 여고 재학 시절 부산대를 오가면서 연습했어요”고 운을 떼며 “박현은 선생님께서 부산대에 부임하셨을 때 제가 고교 1학년이었습니다. 연습 상대가 없다 보니 훈련을 많이 했고, 많이 늘었어요”라고 진단했다.)
Q :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힘 들지는 않았는지?
A : 진짜 힘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했었나'하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께서 만족하셔야 운동을 마칠 수 있었는데 부족한 실력을 갖고 있다 보니 운동 시간이 계속 늘기도 했다. 선수 인원도 3년 내내 두 자릿수가 되지 않아서 당시 부산대 언니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언니들과 함께 훈련했던 기억이 난다.
(박인아는 당시를 떠올리며 많았던 훈련량에 혀를 내둘렀다. 그녀는 “제가 고1때 선수가 7~8명 정도 됐어요. 한 명 뿐이던 3학년 언니가 다치고, 저희 위에는 언니가 두 명인데 저희 학년 애들이 좀 더 잘 해서 저희 학년이 더 많이 뛰었어요”라면서 “새로 오신 선생님도 부산대로 훈련을 다니셨어요. 동주여고 3년, 부산대 4년을 부산대에서 훈련했어요”면서 학교를 오가며 훈련하는 것에 대한 소회를 전했다.)
Q : 부상 당시 어땠는지?
A : 진통제를 먹고, 과도하게 몸을 끌어 올렸다. 5분인가 3분 만에 7점을 몰아치고 잘 넣었다. 잘 되는 것 같았다. 몸도 가벼웠다. 오른쪽 아킬레스건염이 심했는데 그날 유독 왼쪽이 아프더라. 신발끈 다시 묶고 스프레이 뿌리고 나섰는데 끊어진 걸 직감했다. 왼쪽이 끊어진 것이다.
(당시를 떠올리며 박인아의 눈에서 복잡했던 심경을 읽을 수 있었다. “제가 주도적인 공격이 많았어요. 엄청 빠른 속도로 가다가 슛도 던졌거든요. 그날 잘 됐고, 보여줘야지 압박도 있었어요”라고 운을 떼며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라고 전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일어섰다. 남다른 정신력을 지니고 있는 이답게 곧바로 생각을 고쳤다. 박인아는 이후 “진짜 큰일 났다 망했다 이럴 줄 알았는데, 재활을 해서 뒤에 잘 해야겠다고 바로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입을 열며 “재활하면 더 좋아지겠지 생각했어요. 힘든 건 그 때 생각하고자 했어요”라며 의지를 다졌다고.)
Q : 부상 이후, 현재 상태는 어떤지?
A : 첫 부상이고, 1년 정도 뛰지 못해서 고민이 많았다. 밖에서 보면서 오히려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경기를 뛰어 보니 공백을 무시하기 쉽지 않더라. 경기를 뛰어 보니 생각보다 달라서 놀라기도 했다. 시즌 중에 들어와서 손발을 경기 중에 맞추는 것 또한 또 다르게 다가왔다. 정규시즌이 끝났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좀 더 정돈된 경기력을 발휘하는 것이 목표다.
Q : 대학 진학 후 포부는?
A : 모든 선수들의 목표와 꿈은 프로 진출이다. 저 역시도 프로를 가고 싶었고 그만큼 높은 목표다. 고등학교 때까지 같이 경기를 뛰던 친구들과 후배들이 프로에 가 있는 걸 보면 나도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더 열심히 해서 꼭 가고 싶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막연한 미래에 대한 외포심이 들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누구나 다수가 가지 않는 길에 대해서 생경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도 “배우는 건 맞지만, 성공하고자 하는 게 농구인데 줄어드는 것 같았어요”라고 말을 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대학 때 다들 가본다는 MT한 번 안 가고 훈련하고 준비했거든요. 리그 기간 동안 관리도 잘 했어요”라면서 시즌을 치르는 동안 준비에 있어서 누구보다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외부 변수가 생겼다. 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해 농구 선수로서의 일정은 고사하고 대학생으로서 일상을 누리는 것 또한 어렵게 됐다. “2학년이 돼서 코로나바이러스가 확산되면서 대학 생활을 즐기기도 쉽지 않아졌어요. 1학년 때 못 논 게 없지 않아 아쉽기도 해요”라면서 못내 열심히 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박인아의 눈에는 항상 결기가 보였다. 아쉽지만 시간이 지났으니, 이내 단념하고도 앞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일념이 보였다. 그녀의 성공에 대한 열의와 해나가고자 하는 의지는 다른 누구보다 대단하다는 게 느껴졌다.)
Q : 현재의 농구에 대한 생각이나 본인이 추구하는 바는?
A : 팀에 기반한 농구를 좋아한다. 기회를 만들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농구를 선호한다. 요즘 흐름은 1대 1 하는 걸로 바뀌는 것 같다. 따라가야 한다. 지금 느끼는 게 제가 부상으로 잠시 빠졌을 때, 팀농구를 보고 있다. 거꾸로 팀플레이에 강박이 있다 보니, 보는 입장에서 답답하더라. 1대 1과 팀플레이가 잘 섞여야 한다. 밖에서 보니 보이더라. 틀을 깨야 한다는 걸 느낀다.
(박인아는 부상으로 출장하지 못할 때도 선수들을 독려했다. 저학년 선수들이 이제 팀에 녹아들고 있을 때 가교로 나서기도 했다. 벤치에서 누구보다 크게 소리를 지르는 것은 물론 뛰고 있는 선수들을 위해 기합을 불어 넣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비록 뛰지 못했지만, 마음 만큼은 누구보다 팀을 위해 헌신하고 있음은 물론 누구보다 부지런히 움직였다.)
Q : 청소년 대표팀에서 뛸 때는 어땠는지?
A : 처음 된 게 16세 이하부터 19세 이하까지 계속 참여. 아시아선수권 17세 세계선수권, 19세 세계선수권에 나섰다. 저희 학년에 잘 하는 선수들이 많다.
(박인아는 자신과 함께 했던 이들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다. “계속 같이 다녔던 친구가 (이)소희(BNK), (박)지연(우리은행)이랑 같이 붙어 다녔어요”라고 설명했다. 이소희는 이번 시즌 개막전 때 직접 경기장을 찾아 친구를 응원했다.)
사진_ 박영태 기자
바스켓코리아 / 이재승 기자 considerate2@basket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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