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정담[동아광장/김금희]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2022. 9. 14. 03:04
추석날 어머니가 들려준 소녀 때 추억
가족 간 실금 같은 연계 확인하는 게 명절
정담 남기고 험담 덜어내는 가을 됐으면
가족 간 실금 같은 연계 확인하는 게 명절
정담 남기고 험담 덜어내는 가을 됐으면
추석날 직전까지 마감 원고를 쓰다가 반찬가게에 예약해놓은 음식을 찾으러 갔다. 손이 많이 가는 전이나 부침은 사서 놓자는 내 오랜 권유를 어머니가 드디어 받아들이신 것이다. 이번 음식이 괜찮아야 다음에도 이 방법이 통할 텐데 약간 걱정이 들었다. 안 되면 추석 직전 성균관에서 발표한 차례상 표준안을 알려드려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남편도 그러겠다고 했다. 표준안에는 명절 노동의 주범인 전 같은 기름진 음식은 올리지 않는 것이 예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내려가 보니 어머님은 새 표준안에 대해 이미 알고 계셨다. 기사로 접하면서 이런 권고가 부모님들에게 효과가 있을까 싶었는데 적어도 어머님은 그 내용을 눈여겨보신 듯했다. 음식을 사다가 놓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는데 때마침 전통과 권위의 성균관에서 거기에 확실한 당위를 부여해준 셈이었다. 어차피 올릴 필요 없는 전과 튀김이라면 조금 사다가 구색을 맞추는 정도로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차례상에 올라온 음식 중 가족들의 시선을 빼앗은 건 단연 멜론이었다. 멜론이 그 상에 놓인 데는 사연이 있었는데 ‘배달 사고’로 들어온 과일이기 때문이었다. 보낸 과일을 잘 받았다고 전화 주시면서 어머님이 “어머나, 멜론이 너무 싱싱하다, 얘…” 하셨을 때가 다시 한번 화제로 올랐다. 제사 때 쓸 과일을 사면서 누가 멜론을 넣을까. 명절 의례라고 하면 좀 난색부터 표하는 나이지만 어떤 과일이 오르는가 하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판매처에 전화를 걸어 배달 사고를 알렸더니 회수하고 다시 갖다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주에는 이미 태풍이 예고되어 있었고 그게 아니라도 명절 대목에 배송 기사들이 어떤 스케줄로 일하고 있을지는 알 만한 것 아닌가. 어머님은 그냥 멜론을 먹자고 하셨다.
제사를 지내는데 어머님이 돌아가신 아버님도 멜론을 아주 좋아했다고 말씀하셨다. 매번 올리는 사과나 배보다는 오히려 반겼을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아버님이 드시고 싶어서 일부러 배송 담당자가 실수하게 만들었을지 모른다는 농담이 가족들 사이에서 나왔고 만약 그랬다면 오히려 제대로 된 제사상이 차려진 것이니까 잘된 일이라는 말을 주고받았다.
끝나고 식사를 하는데 식구들의 대화가 길고 길게 이어졌다. 공간도, 시간적 배경도, 각자의 입장도 서로 다른 다양한 이야기가. 어머님이 서울에 있는 한 중학교의 입학시험을 봤다는 건 남편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아버지가 권해 시험을 보러 갔는데 건물들이 너무 높고 사람이 무섭도록 많고 화장실도 못 찾을 만큼 복잡해 그만 시험장을 찾지 못했다고. 내내 시골에서 살았던 열세 살 소녀가 갑자기 서울로 와 일생일대의 시험을 봐야 했을 때 얼마나 눈이 캄캄했을지, 그렇게 시험을 망치고 도로 내려가야 했을 때 얼마나 자책했을지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어머님은 아마 시험을 제대로 봤더라도 떨어졌을 거라고 하면서도 그렇게 큰딸에게 새 길을 열어주고 싶어 했던 당신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리움에 잠기시는 것 같았다. 꽁치 한 마리를 사면 늘 큰딸의 몫으로 가운데 토막을 남겨두었던 당신은 큰비가 오는 날 밤길을 걷다 사고로 갑작스럽게 가족들 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어때, 소설 한 편 나왔어?”
어머님 마음이 슬픔에 잠긴 걸 눈치챘는지 남편이 농담으로 분위기를 바꿨다.
“아니야, 나 소설 쓰려고 듣고 있었던 거 아니야.”
나는 손까지 저으며 부정했지만 그 슬픈 여름날이, 마치 당신의 운명을 예감하셨던 것처럼 “오늘은 집에 못 들어올 테니 문단속 잘하고 자라” 하고 마지막 인사를 하셨다는 그 오십 년 전 한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고 들리는 듯했다.
당일 일정을 마치고 다시 내 집으로 가는데 결국 명절이란 그저 이야기가 남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과거를 복기하고 그 재현을 통해 가족들 사이의 실금 같은 연계들을 그려보는 것. 먼저 산 사람들이 어떤 슬픔과 기쁨을 건너 여기까지 왔는지 느끼고 알게 되는 것.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내게도 추석 때의 모든 대화들이 정답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오랜 시간이 지나면 결국 그 모든 사사로운 불쾌감들은 흐릿해지고 여기 없는 사람들과 지나간 순간에 대한 용인과 그리움만 남게 될 거라는 것. 그러니 추석 때의 많은 말들 중 정담은 남기고 험담은 덜어내 되도록 간소한 마음을 만들었으면 한다. 그것이 가을을 맞는 우리의 새로운 표준안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내려가 보니 어머님은 새 표준안에 대해 이미 알고 계셨다. 기사로 접하면서 이런 권고가 부모님들에게 효과가 있을까 싶었는데 적어도 어머님은 그 내용을 눈여겨보신 듯했다. 음식을 사다가 놓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는데 때마침 전통과 권위의 성균관에서 거기에 확실한 당위를 부여해준 셈이었다. 어차피 올릴 필요 없는 전과 튀김이라면 조금 사다가 구색을 맞추는 정도로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차례상에 올라온 음식 중 가족들의 시선을 빼앗은 건 단연 멜론이었다. 멜론이 그 상에 놓인 데는 사연이 있었는데 ‘배달 사고’로 들어온 과일이기 때문이었다. 보낸 과일을 잘 받았다고 전화 주시면서 어머님이 “어머나, 멜론이 너무 싱싱하다, 얘…” 하셨을 때가 다시 한번 화제로 올랐다. 제사 때 쓸 과일을 사면서 누가 멜론을 넣을까. 명절 의례라고 하면 좀 난색부터 표하는 나이지만 어떤 과일이 오르는가 하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판매처에 전화를 걸어 배달 사고를 알렸더니 회수하고 다시 갖다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주에는 이미 태풍이 예고되어 있었고 그게 아니라도 명절 대목에 배송 기사들이 어떤 스케줄로 일하고 있을지는 알 만한 것 아닌가. 어머님은 그냥 멜론을 먹자고 하셨다.
제사를 지내는데 어머님이 돌아가신 아버님도 멜론을 아주 좋아했다고 말씀하셨다. 매번 올리는 사과나 배보다는 오히려 반겼을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아버님이 드시고 싶어서 일부러 배송 담당자가 실수하게 만들었을지 모른다는 농담이 가족들 사이에서 나왔고 만약 그랬다면 오히려 제대로 된 제사상이 차려진 것이니까 잘된 일이라는 말을 주고받았다.
끝나고 식사를 하는데 식구들의 대화가 길고 길게 이어졌다. 공간도, 시간적 배경도, 각자의 입장도 서로 다른 다양한 이야기가. 어머님이 서울에 있는 한 중학교의 입학시험을 봤다는 건 남편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아버지가 권해 시험을 보러 갔는데 건물들이 너무 높고 사람이 무섭도록 많고 화장실도 못 찾을 만큼 복잡해 그만 시험장을 찾지 못했다고. 내내 시골에서 살았던 열세 살 소녀가 갑자기 서울로 와 일생일대의 시험을 봐야 했을 때 얼마나 눈이 캄캄했을지, 그렇게 시험을 망치고 도로 내려가야 했을 때 얼마나 자책했을지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어머님은 아마 시험을 제대로 봤더라도 떨어졌을 거라고 하면서도 그렇게 큰딸에게 새 길을 열어주고 싶어 했던 당신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리움에 잠기시는 것 같았다. 꽁치 한 마리를 사면 늘 큰딸의 몫으로 가운데 토막을 남겨두었던 당신은 큰비가 오는 날 밤길을 걷다 사고로 갑작스럽게 가족들 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어때, 소설 한 편 나왔어?”
어머님 마음이 슬픔에 잠긴 걸 눈치챘는지 남편이 농담으로 분위기를 바꿨다.
“아니야, 나 소설 쓰려고 듣고 있었던 거 아니야.”
나는 손까지 저으며 부정했지만 그 슬픈 여름날이, 마치 당신의 운명을 예감하셨던 것처럼 “오늘은 집에 못 들어올 테니 문단속 잘하고 자라” 하고 마지막 인사를 하셨다는 그 오십 년 전 한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고 들리는 듯했다.
당일 일정을 마치고 다시 내 집으로 가는데 결국 명절이란 그저 이야기가 남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과거를 복기하고 그 재현을 통해 가족들 사이의 실금 같은 연계들을 그려보는 것. 먼저 산 사람들이 어떤 슬픔과 기쁨을 건너 여기까지 왔는지 느끼고 알게 되는 것.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내게도 추석 때의 모든 대화들이 정답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오랜 시간이 지나면 결국 그 모든 사사로운 불쾌감들은 흐릿해지고 여기 없는 사람들과 지나간 순간에 대한 용인과 그리움만 남게 될 거라는 것. 그러니 추석 때의 많은 말들 중 정담은 남기고 험담은 덜어내 되도록 간소한 마음을 만들었으면 한다. 그것이 가을을 맞는 우리의 새로운 표준안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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