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대북 헛똑똑이들
“함께 기념하자” 제안하며
“北 안다” 자랑한 운동권 정권
헛똑똑이들이 ‘북핵 완성’ 도와
추석 연휴 첫날 공개된 북한 김정은의 최고인민회의 육성 시정연설은 50분 45초 동안 이어졌다. 연단에 선 김정은은 “백 날, 천 날, 십 년, 백 년 제재를 가해 보라. 절대로 핵을 포기할 수 없다” “비핵화를 위한 그 어떤 협상도, 맞바꿀 흥정물도 없다”고 했다. 1만9000자 분량인 연설문의 약 40%가 이런 내용이었다. 김정은 발언 가운데 가장 노골적인 ‘비핵화 불가’ 선언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임기 내내 주장한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는 어디로 간 걸까.
문재인 정부가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말하기 시작한 건 2018년 3월 특사단 방북 이후다. 김정은이 말했다는 “비핵화는 선대(先代)의 유훈”이란 발언이 근거였다. 선대란 김일성을 뜻한다. 그 시절 북의 핵 개발은 초보 단계였다. 당연히 비핵화는 북핵이 아니라 미국의 핵우산·전술핵을 겨냥했다. 이걸 1970년대엔 ‘조선반도 비핵지대화’라고 하다가 ‘조선반도 비핵화’로 바꿨고, 김일성 사후 ‘유훈’으로 포장했다. 문재인 정부는 이걸 알면서도 세상을 속인 걸까. 지난 5년을 복기해 보면 오히려 북한에 무지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대표적인 사례가 3·1운동 100주년을 북과 공동 기념하겠다는 발상이었다. 북에 공동 학술회의, 전시회, 음악회, 남북 대학생 평화 대장정 등을 제안했다가 전부 거부당했다. 북이 3·1운동을 ‘탁월한 수령의 지도를 받지 못해 실패한 부르주아 민족운동’으로 폄훼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공동 기념 제안에 응할 리 없었다. 북은 100주년 전날에도 “3·1 인민 봉기는 외세 의존에 물젖은 상층 인물들의 잘못된 지도로 실패했다”며 악담을 퍼부었다.
김정은을 2019년 부산 한·아세안 정상 회의에 초청하려 한 것도 무지의 소산이다. 수령 중심 세계관을 가진 북의 체제 특성상 김정은의 다자 회의 참석은 수령의 권위에 어긋난다. 그런데도 문 정부의 러브콜이 이어지자 북은 한·아세안 정상 회의를 “우리와 인연이 없는 복잡한 국제회의 마당에서 악수나 하고 사진이나 찍는 것”으로 비하하며 공개 망신을 줬다. 논란이 된 귀순 어부 강제 북송도 김정은 초청을 위해 무리수를 두는 과정에서 벌어졌다. 김정은 초청 소식을 뒤늦게 접한 일부 아세안 국가가 불쾌감을 표시하는 등 외교적 잡음도 일었다.
가장 안타까운 건 2018년 9월 문 대통령의 능라도 5·1 경기장 연설과 백두산 방문이었다. 북은 한국 대통령의 방북을 “수령님의 고매한 풍모를 흠모한 결과”로 선전한다. 평양은 단순히 수도가 아니라 김씨 왕조를 떠받치는 당·정·군 엘리트 집단만 거주하는 특수지역이고, 우리가 ‘민족의 영산’이라 부르는 백두산도 북에선 김일성·김정일 얼이 서린 ‘혁명의 성산(聖山)’이다. 한국 대통령의 등장 자체가 김정은 우상화의 소품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5·1 경기장에 운집한 15만명의 박수 갈채도 문 대통령이 아니라 김정은을 향한 것이었다. 문 대통령은 최근에도 당시를 “남북 관계 최고의 장면”으로 회고했다. 김정은이 연출한 북 체제 선전 쇼의 배우였단 걸 모른다.
문 정부엔 대통령 말고도 비서실장과 통일장관을 비롯해 북을 안다고 자부한 운동권 출신들이 수두룩했다. 실상은 낭만적 대북관에 젖어 북한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전직 정보기관 고위 관리는 “책과 선전 매체로 북을 접한 운동권의 대북 인식이 80년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헛똑똑이들이 ‘평화 쇼’에 골몰하는 사이 북은 핵을 완성하고 대남 핵 선제 타격 계획을 법제화했다. 일부러 그러진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북이 마음 편히 핵을 개발하도록 도운 꼴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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