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영감과 경영자의 촉이 만나면.. [고두현의 문화살롱]
시와 경영의 공통 뿌리는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
베틀과 말고삐 능숙히 다루듯
언어와 손 활용해 창의력 발휘
박성훈·신창재 회장 '명예시인'
박현주·김영섭 '시 경영'도 눈길
고두현 논설위원
추석 연휴에 몇몇이 모여 ‘파자(破字) 놀이’를 했다. 글자의 짜임을 풀어서 다양한 의미를 찾고 어원을 추적했다. 그 과정에서 뜻밖의 과실을 얻었다. 시인과 기업인이 함께한 자리여서 자연스레 시(詩)와 경영(經營)이 화두에 올랐는데, 놀랍게도 두 분야의 공통점이 많았다.
시(詩)라는 한자는 ‘말씀 언(言)’과 ‘절 사(寺)’로 이뤄져 있어 흔히 ‘말씀의 사원’이라고 한다. 하지만 ‘절 사’는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 생긴 의미다. ‘사’로 읽으면 ‘집’이지만, ‘시’로 읽을 땐 ‘관청’을 뜻한다. 그래서 시는 관청의 규율과 법칙, 운율과 형식을 갖춘 언어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뜻이 나아가는 바를 말로 나타낸다’와 ‘손을 움직여 일한다’는 의미도 내포돼 있다.
가장 짧은 문장으로 긴 울림을
영어 단어 시(poetry)는 ‘만들다’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poesis)에서 유래했다. 이는 ‘제작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poiein)에서 파생됐다. 시인(poet)이라는 단어 역시 ‘창작하다, 발명하다, 만들다’에서 나온 것이다.
경영은 어떤가. ‘지날 경(經)’은 ‘다스리다’와 ‘날실’을 뜻한다. 실()이 베틀 사이로 지나가듯이 기초를 닦고 차근차근 일을 해나간다는 것이다. ‘경영할 영(營)’은 불(火)을 켜고 집(宮)에서 늦도록 일을 하듯 무언가를 ‘계획하고 짓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영어 단어 경영(management)의 어원은 ‘손’을 뜻하는 라틴어(manus)다. 이것이 13세기 이탈리아어의 말고삐를 다루는 능력(maneggiare)으로 이어졌다. 한마디로 말하면 고삐를 쥐고 말을 잘 다룬다는 얘기다.
이렇게 보니 시인과 경영자의 닮은 점이 참 많다. 둘 다 무언가를 만들거나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이다. 시가 ‘가장 짧은 문장으로 가장 긴 울림을 주는 것’이라면, 경영은 ‘가장 희박한 가능성에서 가장 풍성한 결실을 이루는 것’이다. 시인이 하늘의 별을 우러러보면 경영자는 발밑의 땅을 고르고 이랑을 돋운다. 이럴 때 시인의 영감과 경영자의 촉수가 동시에 빛난다.
시인의 영감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셰익스피어는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서 “그것이 어디에서 자라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마음속에서입니까? 아니면 머릿속에서입니까?”라고 묻는다. 그것은 마음도 머리도 아닌 온몸에서 나온다. 몸속 세포에 각인된 경험과 상상의 총합이 곧 영감인 것이다.
니콜라 푸생의 그림 ‘시인의 영감’에서 아기천사가 월계관과 책을 동시에 들고 시인 옆에 머물러 있는 게 이를 상징한다. 이 그림 중앙에는 아폴론이 악기(리라)를 안고 앉아 있다. 왼쪽에는 시의 뮤즈 칼리오페가 플루트를 들고 서 있다. 맞은편에는 젊은 시인이 펜을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영감을 기다리고 있다. 그의 머리 위에서 아기천사가 월계관을 막 씌워주려는 모습을 보니, 곧 번득이는 영감이 시인에게 내릴 것만 같다.
"기업은 영성을 알아야 한다"
시인의 영감과 같이 경영자의 감각을 확장시키는 매개는 정신의 촉(觸)이다. ‘마케팅의 신’으로 불리는 필립 코틀러가 <마켓 3.0>에서 “기업이 영성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경영자야말로 시인의 영감을 섬세하게 포착해서 영혼이 담긴 브랜드와 제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닌가.
예컨대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서 아이디어를 얻었고, 나이키 창업자 필 나이트는 도서관에 들어갈 때 구두를 벗어들 정도로 시를 숭배했다. ‘신용카드의 아버지’ 디 호크가 비자를 창업할 때 영감을 얻은 것은 12세기 페르시아 시인 오마르 하이얌의 시집 <루바이야트>였다.
우리나라에도 시에서 영감을 얻는 경영자가 많다.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광화문 글판’에 시를 새기고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과 대산문학상까지 지원해 한국시인협회로부터 ‘명예 시인’ 칭호를 받았다. 신 회장은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게 하는 시가 우리를 위로하고 성장하게 돕는다”며 시의 함축적인 의미로 공감대를 넓힌다.
박성훈 재능그룹 회장도 ‘명예 시인’이다. 그는 1977년 재능교육을 창업한 이래 교육기업에 시와 인문의 향기를 접목해 왔다. 전국 최대 규모의 재능시낭송대회를 32년째 열고, 서울 혜화동 재능문화센터(JCC) 설계를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에게 맡긴 것도 남다른 ‘시사랑’ 덕분이었다.
명함에 한시 붙여 건네는 CEO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은 딱딱한 금융업에 부드러운 시의 옷을 입혔다. 박 회장은 지금도 창립기념일 등 주요 행사에서 ‘잊지 말라./ 지금 네가 열고 들어온 문이/ 한때는 다 벽이었다는 걸.// 쉽게 열리는 문은/ 쉽게 닫히는 법./ 들어올 땐 좁지만/ 나갈 땐 넓은 거란다’(고두현의 ‘처음 출근하는 이에게’ 부분)는 시구를 인용하며 “벽을 문으로 바꾸고, 좁은 문을 넓은 길로 만드는 혁신가가 되겠다”고 다짐한다.
김영섭 LG CNS 사장은 명함에 멋진 한시 구절을 오려 붙이고 다닐 정도로 시를 좋아한다. 고사성어도 막힘이 없다. 2015년 말 사장 취임 때부터 ‘해현경장(解弦更張·거문고 줄을 바꾸어 맨다)과 사요무실(事要務實·일을 하는 데 중요한 것은 실질에 힘쓰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며 새롭게 나아가자’는 메시지로 ‘시 경영’을 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 업계 최고의 성장 신화를 8년째 이어가고 있다.
시인의 영감과 경영자의 지혜가 만나는 접점에서 새로운 통찰의 문이 열린다. 시가 뇌의 특정 영역을 자극한다는 사실은 여러 실험으로도 밝혀졌다. 영국 연구진에 따르면 시를 읽으면 여러 겹의 의미와 이미지를 떠올릴 때 뇌의 특정 부위가 활발하게 반응했다.
이는 현실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시를 해석하고 음미하는 것만으로 통찰력을 기를 수 있다. 시는 언어 지능과 감성 지능을 동시에 높여준다. 리더십과 실적이 향상되면 ‘경영의 월계관’까지 쓸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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