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정 칼럼] 보수 여당 대표의 처신

선우정 논설위원 2022. 9. 14. 00: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 의해 수정되어 본문과 댓글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보수주의는 순결한 사람만
정치해야 한다고 위선 떨지 않는다
단 문제가 생겼을 때
먼저 도덕성에 따라 처신하라는 것이다

정치인에게 감동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재작년 제주도 광복절 경축식 때 원희룡 제주지사의 모습이 그랬다. 광복회 관계자가 이승만 대통령과 백선엽 장군을 맹비난하는 김원웅 광복회장의 독설을 기념사라며 대독했다. 그러자 원 지사는 단상에 올라가 이를 반박했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치우친 역사관을 기념사라고 대독하게 한 처사에 대해 매우 유감입니다. 김일성 공산 군대가 대한민국을 공산화시키려고 왔을 때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던 군인과 국민이 있습니다. 그중엔 일본군에 복무했던 분도 있습니다. 역사 앞에서 우리는 공과 과를 겸허하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만이 옳고 나머지는 모두 단죄받아야 된다는 식으로 역사를 조각내는 시각에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듬해 김 회장은 야당을 향한 노골적인 저주로 발언 수위를 올렸다. 과거 보수 정부를 ‘친일 정권’으로 단정하고 “이들은 대한민국 법통이 조선총독부에 있다고 믿는다”고 주장했다. 경축식 현장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침묵했다. 같은 편이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야당 대표는 다르다. 연설은 화상으로 진행됐다. 원 지사였다면 송출 중단을 요구하고 항의했을 것이다. 퇴장해도 괜찮았다. 정당 대표가 굴욕을 당하고도 그냥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또 다른 굴욕이기 때문이다.

작년 8월 15일 서울 중구 문화역서울284(옛 서울역)에서 열린 제76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김원웅 광복회장, 문재인 대통령 부부와 함께 만세를 외치고 있다. 이날 김 회장은 영상을 통해 국민의힘을 친일 정당으로 모욕했다. /연합뉴스

그런데 이준석 대표는 반응이 없었다. 경축식이 끝나자 문 대통령 부부에게 꾸벅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이날 그를 사로잡은 건 야당 내에서 일어난 이른바 통화 녹취록 유출 공방이었던 것 같다.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쏟아낸 이 대표의 이날 발언은 대부분 이 문제에 대한 변명이었다. 언제나 그에겐 외부 공격보다 내부 공격이 훨씬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역사적 정당성, 보수의 가치, 이런 말은 재미없다. 원 지사가 “김일성 공산 군대”라며 반론을 시작했을 때 “아, 또 저 얘기”라며 외면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일반인은 그래도 된다. 하지만 당대표는 다르다. ‘거인의 어깨 위에 있는 난쟁이’ 표현은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에 대한 비유로도 유명하다. 이준석 대표가 강한 발언권을 가진 이유는 앞선 보수 정당 선배들의 위대한 업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그들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에 비유할 수 있다. 거인을 모독하는데 이 대표가 침묵했다. 원 지사의 말처럼 “역사 앞에서 공과 과를 겸허하게 보는 자세”로 “치우친 역사관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는 것”이 대표의 의무였다. 그런데 지키지 않았다.

지난달 이 대표의 눈물 회견은 ‘개고기 발언’ 말고도 보수의 시각에서 주목할 부분이 많았다. 이 대표는 “국민의힘 지지층 절반이 태극기를 보면 자동으로 왼쪽 가슴에 손이 올라가는 국가 중심의 가치를 중시하는 당원”이라고 했다. 국기에 대한 애정으로 표현되는 애국주의와 국가주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대표는 “썩어서 문드러진 반공 이데올로기” “60년째 북풍의 나발을 부는 집단”이라고 정권을 비판했다. 하지만 반공은 썩어서 문드러지지 않았고 북풍 나발 역시 멈출 수 없다. 윤핵관 때문이 아니라 북핵과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 때문이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는 말에 틀린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도 틀렸다. 세율 인상 없이 경제를 키워 복지를 감당한 사례가 많다. 필요하면 증세를 할 수 있지만 마지막까지 자제하는 게 보수다.

이준석 대표가 8월 13일 오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당 비상대책위원회 체제 전환에 대한 가처분 신청 등과 관련해 직접 입장을 밝히던 중 눈물을 닦고 있다.

보수의 관점에서 이 대표의 핵심 문제는 도덕성이다. 논란이 많은 성 매수 주장을 들추려는 게 아니다. 보수주의는 좌파처럼 순결한 사람만 정치를 해야 한다고 위선 떨지 않는다. 다만 문제가 생겼을 때 법에 앞서 도덕성을 처신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 때 어떤 총리 후보자는 변호사 수임료 16억원 때문에 물러났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었지만 도덕성을 중시해 자진 사퇴했다. 보수적 가치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이 대표의 정무실장은 성 매수 주장과 관련된 제보자에게 7억원 투자 각서를 써줬다고 한다. 만약 대통령 부인의 비서관이 유흥업소 취업 주장과 관련된 제보자에게 투자 각서를 써준 사실이 드러났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차이가 없다고 본다. 보수 정당 대표라면 그는 이 일만으로 스스로 물러났어야 한다. 그런데 그는 일가족 비리 수사 때 조국 교수와 당시 집권자들이 보여준 행동을 따라 하고 있다. 도덕성이 아니라 대중 선동을 처신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국민의힘은 전후 고도 성장을 정치 영역에서 지원하면서 성공하려고 노력하는 다수 국민을 대변해 왔다. 업적으로 말하면 세계 보수 정당 가운데 손꼽히는 정당이다. 맨파워도 밀리지 않는다. 그런데 자신의 가치를 모르는 듯하다. 가치를 모르니 보수에 어울리는 내부 인재를 제대로 찾지 못한다. 문제만 생기면 특정인의 인기에 의존해 우르르 몰려 다닌다. 이번 파동도 그러다가 일어난 일이다. 이런 체질을 바꿀 수 있다면 더 세게 당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