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눈] 고검장님, 처장님, 그리고 장관님

김태훈 2022. 9. 13.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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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법제처장, 정권 바뀔 때마다
차관급·장관급 오르내리기 일쑤
급·격식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본분 다하는 게 공직자의 자세

“지난 호 ‘차관 및 차관급 인사’ 기사 중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은 차관급이 아닌 장관급이므로 바로잡습니다.”

최근 서울대 총동창회 신문에 이런 정정보도문이 실렸다. 윤석열정부의 차관 및 차관급 공직자 가운데 서울대 동문만 추린 명단을 보도한 게 화근이었다. 보훈처장이 장관급으로 격상된 점을 잊고 실수한 것이다. 보훈처에 ‘뭘 그런 걸 갖고’ 할 생각은 없다. 다만 공부 제일 잘한다는 학생들을 가만히 앉아 ‘쓸어 담는’ 서울대가 고위공직자를 많이 배출한 게 뭐 그리 자랑스럽다고 유난을 떠는지 마뜩잖다.
김태훈 오피니언담당부장
보훈처장은 정권교체 때마다 장관급과 차관급을 오르내렸다. 문득 전직 보훈처장 자제 결혼식에 갔을 때가 떠오른다. 마침 혼주의 옛 상사인 전직 국무총리가 주례사를 했다. 그는 신랑 아버지 인품을 극찬하며 ‘우리 ○○○ 장관’이란 표현을 수십 번도 더 썼다. 차관급 아닌 장관급 보훈처장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행여 하객들이 ‘아, 차관급까지 지낸 분이구나’ 하고 오해하면 신랑 신부 양가 식구들이 섭섭해할 수 있으니까. 하긴, 장관이 얼마나 대단한 자리인가. 집안에서 장관 한 명 나오면 ‘가문의 영광’으로 통하는 게 한국 사회다.

법제처장도 비슷하다. 정권에 따라 언제는 장관급이다가 지금은 또 차관급이다. 예전에 서초동 한 음식점에서 식사하는데 옆 테이블 사람들 얘기가 흥미로웠다. 검찰 관계자로 추정되는 일행은 고검장을 거쳐 법제처장까지 지낸 어느 인사를 화제로 올렸다. 퇴임 후 그 호칭 때문에 옛 부하들 사이에 때아닌 토론이 벌어졌다는 내용이다. 고검장을 끝으로 검찰을 떠났으니 ‘고검장님’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과 어쨌든 법제처장으로 공직을 마무리했으니 ‘처장님’이 낫겠다는 의견이 맞선 가운데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가만, 그 양반이 있을 적엔 법제처장이 장관급이었잖아. 그냥 처장님 하면 차관급처럼 들려 서운해할 수 있으니 ‘장관님’이 좋을 듯하네.”

지난 6월7일 방한 중이던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부(副)장관이 한덕수 국무총리를 예방했다. 미 국무부는 몸집이 워낙 커 장관과 복수의 차관 사이에 부장관을 둔다. 그렇더라도 장관이 아닌 이상 한국에 오면 차관급 대접을 받는다. 그런데 셔먼과 만난 한 총리는 좌석 배치 등에서 거의 동급으로 예우했다. 직접 꽃다발까지 건네며 환대했다.

미국이 아무리 중요해도 그렇지 과공(過恭) 아닌가 했는데 이유가 있었다. 한 총리가 주미대사이던 시절 셔먼은 미 국무부 정무차관으로 업무상 긴밀히 접촉하는 파트너였다. 꽃은 그날 73회 생일을 서울에서 맞은 셔먼을 위해 준비한 작은 선물이었다. 마침 두 사람은 1949년생 동갑내기다. 여러 사정을 감안해 한 총리가 최대한의 호의를 베푼 것이다.

셔먼의 속내는 어땠을까. 직접 물어보지 않아 알 순 없지만 ‘같은 나이에 누군 아직 차관급이고 누군 일국의 재상이라니 세상이 불공평하네’ 하며 섭섭하게 여기진 않은 듯하다. 그렇게 ‘급’을 따지는 인물이라면 애초 자신보다 13살이나 어린 토니 블링컨(60) 국무장관을 상사로 모시고 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주미대사 시절 잘 지낸 사람이 한국 총리가 돼 한·미 간 협조가 원활하니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어’ 하고 흡족해하지 않았을까.

급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자신의 능력에 걸맞은 직책에서 주어진 본분을 다하는 것이 올바른 공직자의 자세 아닐까 한다. 또 내가 상급자라고 늘 의전과 격식을 요구하기보다 때로는 과감한 파격을 선보이는 것이 주변에 작은 감동을 선사하고 조직 분위기도 한결 밝게 만들 수 있을 듯하다.

피플면을 담당하는 필자는 부고 기사 쓸 일이 많다. 망자의 경력을 정리하며 급을 중시하는 우리 공직사회 문화를 의식하게 된다. 행여 보훈처장이나 법제처장을 지낸 이가 별세하면 당시 처장의 급부터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물에 따라 처장 뒤에 괄호 하고 ‘장관급’이라고 병기하는 것이 옳지 않겠나 싶어서다. 고인이야 그럴 리 없겠으나, 혹시 유족이 서운해할 수 있으니까.

김태훈 오피니언담당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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