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권위 장사', 혹은 대학의 사망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현직 대통령의 배우자인 김건희 여사의 ‘박사학위 논문’을 둘러싼 논란을 지켜보면서 나는 국민대 당국과 교수들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자살’에 가까운 행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대학에 ‘권위’가 생기는 원천은 연구의 진실성, 그리고 그 연구가 다른 나라나 다른 기관의 연구자들에 의해 이용되고 인용될 수 있는 보편적 가치에 있다. 다른 나라의 연구자는 그렇다 치고, 나름 공부 좀 하는 고등학생이 봐도 ‘연구’라고 할 수 없는, 상당 부분이 다른 자료에서 무단 전재한 글을 ‘학위 논문’이라고 통과시킨 국민대는 이미 대학으로서 권위를 상당히 잃었다. 그럼에도 과거의 오류를 스스로 수정할 수 있는 역량조차 없다는 점이 드러나면 사실 대학으로서는 ‘사망’이 선고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취직 준비를 위한 ‘고등학원’ 역할은 계속할 수 있을지 몰라도 연구의 세계에서는 그런 대학은 완벽한 고립에 빠지게 된다. ‘Yuji대’의 오명을 쓴 학교에 제대로 된 국내 연구자나 유학생·외국 학자들이 올 리 있을까? 아무리 현 정권 존속기간에 정권과의 ‘관계’를 통해 대학에 ‘좋은 일’을 만들겠다는 계산이라 해도, 궁극적으로 대학으로서는 자살이다. 그런데 학교 당국이나 다수의 교수가 이와 같은 자살행위를 선택한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사실, 이번 국민대 당국이나 교수들의 치욕스러운 결정은 권력과 부에 대한 학문의 오랜 종속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것이고, 그 역사를 스스로 반성하지 않으면 결국 역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자명한 이야기지만, ‘완전히 자유로운 학문’이란 본래부터 존재한 적이 없었다. 서양 대학은 국민국가 탄생 이전에는 교회에 종속돼 있었으며, 국민국가 시대에는 많은 경우 국가의 지배적 영향을 받았다. 옥스퍼드나 하버드 같은, 엄청난 규모의 자산을 가진 영미권 명문 사립대들은 스스로 비용 조달이 가능한 만큼 국가의 영향을 덜 받지만 부유층의 계급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적은 결코 없었다. 단, 자유주의 혁명들이 바꾸어 놓은 19세기 유럽의 풍토에서는 하나의 이상으로서 ‘권력으로부터 그 어떤 구속도 당하지 않는 대학 내에서의 자유로운 연구’라는 당위적 관념이 성립했다. 한데 관념은 관념일 뿐이었다.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19세기 독일 태생의 사상가 카를 마르크스는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본대학교 등에서 아무리 구직을 해도 교수직을 얻을 수 없었다. ‘급진파’로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그가 일찌감치 ‘교수’라는 이름으로 독일의 사회귀족이 됐다면 과연 그가 우리가 알고 있는 마르크스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조선시대 학자라면 대개 벼슬길에 오른 지주이자 노비소유주였다. 퇴계 이황을 우리는 보통 ‘위대한 학자’라고 추앙한다. 퇴계가 선조에게 지어 바친 <성학십도>에 담긴 성군의 모습을 자신에게 투사해 ‘이상적 군주’처럼 보이려 했던 박정희는, 유신 시절인 1975년부터 천원권 도안에 퇴계의 얼굴을 새기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퇴계는 전답 3000두락(약 36만평)과 노비 360여명을 보유한 재산가이자, 정2품 대제학까지 오른 고관이었다. 그와 같은 계층에 속하는 이들은, 그 지위와 재산을 지켜주는 국가로부터 과연 어디까지 자율적일 수 있었을까? 단, 군권 못지않게 신권이 강했던 조선에서는, 그와 같은 사대부 명망가들은 국가에 일방적으로 종속됐다기보다는 동시에 국정에 커다란 영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근대에 접어들면서 학자와 권력자 사이 이와 같은 쌍방향성은 많이 옅어지면서 일방적이고 종속적인 관계에 더 가까워졌다. 조선에서 근대란 자유주의 혁명이 아닌 식민화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식민지의 ‘제국대학’은 본질상 식민지배를 위한 기관이었으며, 그 교원들은 학자이기 전에 일차적으로 관료였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조선인 학생들이 해방 이후 한국 학계의 첫 세대를 이뤘다. 그 세대한테 독재국가와의 유착은 거의 공기처럼 자연스러웠다. 한국이라는 신생국가 위에는 그 후견국가인 미국이 있었기에, 한국의 ‘최고 학부’가 돼야 할 국립 서울대의 1호(1948년) 명예박사가 된 사람은 미국 극동군 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었고, 2호(1949년) 명예박사는 초대 주한미군사령관 존 하지 중장이었다. 물론 현직 대통령이었던 이승만도 1949년에 서울대 명예박사가 됐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라이베리아의 독재자인 새뮤얼 캐니언 도와 전례 없는 국고횡령 등으로 세계적 악명을 떨친 자이르의 독재자 모부투 세세 세코도 ‘국립 서울대 명예박사’가 됐다. 그렇게 대학은 국가의 대아프리카 외교에 이바지해야 했던 셈이다.
자신을 학위가 필요 없는 성군으로 인식한 탓인지 박정희는 명예박사 학위는 없었다. 한데 그 중신들의 ‘박사병’은 만만찮았다. 박정희의 신변 경호를 맡은 ‘총잡이’ 차지철만 해도 한양대 법학박사이자 국민대 초빙교수였다. 대학들이 독재정권에 매우 협조적이었던 만큼 정권도 대학의 전임교수들을 ‘챙기는’ 일을 잊지 않았다. 1970년대 국립대 교수 임금은 일반 직장인의 월급(약 20만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정부 관료로 발탁되는 게 비교적 쉬웠다. ‘교수 출신 장차관’이라는 틀이 그때부터 굳어져 지금 윤석열 정부 내각 19명 가운데 5명이 (석좌·객원교수를 포함한) 교수 출신이다. 사실 내각의 4분의 1가량을 교수로 채우는 것은 최근 수십년 동안 유지된 패턴이다. 학계, 대학의 국가에 대한 종속적 ‘협조’의 대가는 결국 폴리페서들의 입신양명이다.
어디 국가뿐이겠나. 신자유주의 시대 대학은 이제 국가 이상으로 ‘돈’에 더 맹목적으로 매달린다. 대학마다 앞다퉈 ‘최고지도자 과정’, ‘최고경영자 과정’ 등을 신설해 부유층 모시기에 바쁘고, 부유층은 부유층대로 이 과정들을 인맥 쌓기와 경력 부풀리기에 이용한다. 김건희 여사가 다녔다는 서울대 문화콘텐츠 글로벌리더 과정도 이런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과연 이와 같은 무분별한 ‘권위 장사’에 매진하는 대학에 연구다운 연구를 할 만한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을까? 국가에 대한 종속 이상으로 돈에 대한 종속은 대학의 ‘죽음’을 의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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